이동용 (수필가/철학자)
고대 ‘신들의 전쟁’으로 알려진 ‘티타노마히아’가 있었습니다. 신족과 거인족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었습니다.
제우스는 좋은 제사음식을 더 원했고, 프로메테우스는 잔꾀를 부려 그의 의도대로 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에 대한 벌로 그는 삼천 년 동안 코카서스 산맥 암벽에 끊어지지 않는 쇠사슬로 묶여 매일 날아와 간을 파먹는 독수리의 날카로운 부리를 견뎌야 했습니다. 삼천 년 동안 참고 견뎌야 했습니다. 그 끝도 없는 고통을 삼천 년 동안.
신들의 세계, 신화시대를 종식시킨 것은 중세인들이었습니다.
중세의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다는 그 유일신만을 믿었습니다. 현실은 믿지 않았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 이런 말로 세상을 바꿨습니다. 오로지 천국이라는 그 하늘나라만이 헛되지 않은 세상으로, 실존의 영역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눈만 뜨면 하늘나라 가서 천사가 되겠노라 다짐하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눈 뜨고 꿈꾼 세월입니다. 일천 년 동안.
중세 천 년도 알고 보면, 천 년 동안 벌어진 생각 속의 전쟁, 생각 간의 전쟁이었습니다. 하늘 바라보기에서 대지 바라보기로 시선을 바꿔놓는데 걸린 시간입니다.
중세를 과거로 만든 근대의 천재들은 자신들의 세상을 일컬어 ‘르네상스’라고 칭했습니다. 말 그대로 번역하면 ‘다시 태어나다’가 됩니다.
근대인의 시선으로 보면 중세는 살아도 산 게 아닌 그런 삶만이 허락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근대는 사람 사는 세상 이야기로 중세를 극복하고자 합니다.
천오백 년경 근대가 시작되었으니 지금 이 순간, 현대까지 합산해도 겨우 오백 년을 조금 넘기고 있을 뿐입니다. 중세는 길었지만, 근대 이후는 여전히 짧기만 합니다.
하지만 깨달음은 순식간에 실현됩니다. 인식은 빛처럼 등장합니다. 번개의 뒤를 따르는 천둥소리는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시간 보내기가 문제입니다. 어떻게 시간을 보내느냐가 관건입니다.
세상과 미래를 책임지는 나의 탄생과 나의 출현을 기대해 봅니다.
나의 나다움을 상상해 봅니다.
왜 그래야 하냐구요?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지.” 동화 속의 문장을 옮겨놓은 한강의 글을 읽으며 글을 쓰는 이유를 공유해 봅니다. 그 글의 제목은 〈여름의 소년들에게〉라고 합니다. 열두 살 때 읽은 동화가, 세월이 흘러 《소년이 온다》로 열매를 맺는 이야기입니다.
백 년이 걸려도 싸워야 할 싸움은 싸워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냐구요? 이 또한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입니다.
쉽지 않은 싸움입니다. 기득권과의 싸움은 늘 길기만 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변합니다.
“이것은 전쟁이다. 그러나 화약도 연기도 없고, 전투 태세도 없으며, 파토스도 사지의 탈골도 없는 전쟁이다.” 니체가 《이 사람을 보라》에서 예고한 전쟁 선포입니다.
“전쟁들이 일어날 것이다. 이 대지 위에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그런 전쟁들이. 나로 인해 최초로 이 대지 위에 위대한 정치가 펼쳐지게 된다.”
니체는 전쟁을 원했습니다. 내면의 전쟁, 양심의 전쟁, 이념 대 이념, 생각 대 생각, 정신 대 정신이 맞붙는 전쟁입니다.
하늘 바라기에서 대지 바라기로 바꾸는 게 이토록 어렵습니다.
신적인 너무나 신적인 발상에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발상으로 바꿔놓는 게 이토록 힘듭니다.
천사에서 전사로 꿈을 바꿔놓는 게 이토록 양심의 가책을 받게 합니다.
썩은 기득권은 늘 똑같습니다. 세금으로 우민화 정책만 펼치고, 개발로 욕심만 부추깁니다. 사람다운 삶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진시황제처럼 분서갱유로 사상을 통제한 것이나, 현대인이 자본으로 언론을 통제한 것이나 다 똑같습니다.
현상은 마야의 베일 같아서 현란합니다.
가상공간이 보여주는 망상으로 자신의 삶을 꿈꾸게 해 놓았습니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눈을 뜰 때가. 백 년이 걸려도 포기하지 않고 싸워야 합니다.
썩은 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