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사의 두 얼굴: 복종의 무게인가, 은혜의 눈물인가?
한 인간의 영혼은, 자신이 받은 것을 기억할 때 비로소 깊어진다. 나는 낯선 땅의 흙먼지를 밟으며, 그 땅의 사람들이 신(神)을 기억하는 두 개의 거룩한 잔치에 참여한 기억이 있다. 하나는 모슬렘들이 '희생제(Eid al-Adha)'라 부르며 뜨거운 태양 아래 양을 잡던 경건한 나눔의 식탁이었다. 다른 하나는 서늘한 늦가을, 기독교 형제들이 '추수감사절(Thanksgiving)'이라 부르며 칠면조와 빵을 나누던 풍성한 감사의 식탁이었다.
이 두 잔치는, 겉으로 보면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다. 신의 은총을 기리고, 넘치는 음식을 차리며, 그중 가장 좋은 것을 떼어 가난한 이들과 나눈다. 인류라는 하나의 영혼이 '감사'라는 보편적 언어로 하나 되는 순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두 식탁에 번갈아 앉아 빵을 떼고 고기를 나누면서, 그 '감사'의 샘물이 솟아나는 근원이, 그 영혼의 뿌리가 향하는 방향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발견된다. 이것은 어느 쪽이 더 고귀한가를 따지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나는 왜 감사하는가?'라는 가장 심오한 질문에 대한, 인류의 두 가지 위대한 대답이다.
기독교의 감사,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한 감사
기독교의 감사는 '유카리스트(Eucharist)', 즉 '성찬'이라는 말의 어원 자체가 '감사'라는 데서 그 뿌리를 찾는다. 17세기 신대륙의 청교도들이 굶주림을 면하고 드린 '추수감사절'의 첫 식탁은, 그 험난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절박한 응답이었다. 그러나 이 감사의 원형은, 단순한 수확의 기쁨을 넘어선다. 그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식탁이다.
이 식탁의 가장 큰 특징은, 우리가 더 이상 '희생제물'을 바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슬렘들이 아브라함의 복종을 '재연하기 위해' 양을 찾아 바칠 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단번에, 영원히 준비하신 그 '어린 양'을 기념한다.
이런 기독교인들의 감사는, 어떤 행위나 자격으로 얻어낸 것에 대한 감사가 아니다. 그것은 전적인 무자격과 절망 속에서, 값없이, '모든 것을' 이미 선물로 받은 자의 눈물 어린 응답(Response)이다.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서 완성된 그 압도적인 사랑에 감격하여 감사의 찬송을 올려드린다.
따라서, 이 식탁은 '의무'의 식탁이 아니라 '자유'의 식탁이다. '복종'을 증명하는 제단이 아니라, 이미 '자녀'가 되었음을 확인하는 '교제(Koinonia)'의 축제이다. 이 감사는 '드려야 하는' 무거운 감사가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겨워 터져 나오는 가벼운 눈물이다.
이슬람의 감사, ‘내가 할 일’에 대한 다짐
모슬렘들의 도시에서 '이드 알 아드하(희생제)'는 가장 큰 명절이다. 이날의 근거는 아브라함(이브라힘)이 신의 명령에 절대복종하여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슬람의 전승)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그 복종의 절정, 그리고, 알라가 그 복종을 받으시고 숫양을 '대속물'로 보내주신 알라의 자비를 기억하는 데 있다.
이날, 모슬렘들은 가장 좋은 양이나 소를 잡는다. 그리고, 그 고기를 삼등분하여 3분의 1은 자신이, 3분의 1은 이웃과 친지에게,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눈다. 이 거대한 나눔의 현장에서, 그 어떤 공동체에서도 보기 드문 경건함과 자비의 실천이 목격된다. 그들의 헌신은 진실로 뜨거웠다.
그러나, 이 식탁의 핵심은 '복종의 재연(Re-enactment)'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복종을 '따라 함으로써' 알라의 자비를 구한다. 이 감사는 '대속물'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이자, 그 대속의 행위를 내가 직접 '수행하고 있다'라는 복종의 고백이다. 이슬람이라는 단어의 뜻 자체가 '복종'이다.
즉, 모슬렘들에게 이 명절은 구원의 완성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향한 복종의 의무를 다짐하는 행위이다. 감사는 여기에서 '의무의 수행'과 깊이 연결된다. 이 감사는 '이미 받은' 가벼운 눈물이 아니라, '드려야 하는' 거룩한 무게를 지닌 감사이다.

주인을 잃은 식탁: 현대의 비극
이토록 숭고한 신학적 뿌리를 가진 두 식탁이, 오늘날 '주인'을 잃어가고 있다. 내가 만난 이슬람권의 수많은 젊은이에게 '희생제'는 알라의 자비를 묵상하는 경건한 시간이 아니라, '고기 먹는 긴 휴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이는 기독교 세계에서도 드러난다. '추수감사절'은 '하나님(Thanks-giving)'이 사라진 채, '터키 데이(Turkey Day)'로 전락했다. 감사의 예배는 형식적 순서가 되었고,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칠면조 요리와 미식축구, 그리고, 다음 날 새벽부터 시작되는 '블랙 프라이데이'의 광란적인 쇼핑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수확물'에만 열광한 나머지, 그 '수확'을 가능하게 하신 '주인'을 잊어버렸다. 잔칫상에 둘러앉아 포식하고 있으나, 정작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는지 모른다. 이것은 신앙의 위기를 넘어선, 인간 존재의 가장 큰 비극이다. 배는 부르되, 영혼은 굶주려 있으며, 손은 가득 찼으나 마음은 공허하다.
우리는 잔치의 '음식'에만 몰두한 나머지, 잔치를 베푸신 '주인'의 얼굴을 잊어버린 가련한 손님들이다. 신(神)이 사라진 감사는 결국 '소비'로 변질되며, '나눔'은 '과시'로 전락하고 만다.
두 개의 식탁과 하나의 질문
나는 복종의 무게를 짊어지고 경건하게 양을 잡던 모슬렘들의 식탁과 이미 완성된 은혜에 감격하여 자유롭게 찬송하던 기독교인들의 식탁을 경험했다. 이슬람의 희생절은 "당신은 알라를 위해 무엇을 희생할 준비가 되었나?"라는 엄숙한 질문을 던진다. 반면, 기독교의 추수감사절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셨다는 것을 믿는가?"라는 감격의 질문을 던진다.
나는 이 두 번째 식탁에서 나의 영원한 감사의 이유를 찾았다. 진정한 감사는 내가 무엇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어떤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터져 나오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이제 곧, 우리의 식탁에도 풍성한 감사의 음식들이 차려질 것이다. 우리는 그저 배를 채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인'을 기억하기 위해 모였다. 우리의 배는 채워졌을지 모르나, 우리의 영혼은 지금 누구에게 감사하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