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동의 거리는 그냥 단순한 길이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영적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 그 자체였다. 하루 다섯 번,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아잔(Adhan) 소리는 시간을 분절하는 알람이 아니라, 존재 이유를 확인하는 영혼의 호흡이었다.
그곳에서 이슬람은 서구인들이 규정하는 '종교'라는 협소한 칸막이 속에 갇혀있지 않다. 그것은 삶의 모든 것이었다. 개인의 윤리이자 공동체의 질서였으며, 통치의 철학이고 경제의 원리였다. 7세기 초, 광야에서 타오른 불길(A.D. 622)은 순식간에 문명을 일구었고, 이후 천 년 넘게 중동의 심장이자 중추로서 고유한 세계를 창조해 냈다. 수많은 외부의 도전 속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성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그들에게 이슬람은 '진리' 그 자체였고, 다른 모든 것은 그 진리 아래에 있었다.
거울의 파괴: 마주한 실패
그러나 이 견고했던 영혼의 성채는 19세기에 이르러 거대한 균열을 맞이한다. 서구에서 밀려온 '다름'은 과거 십자군이나 몽골의 '다름'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것은 압도적인 과학이었고, 치명적인 기술이었으며, 매혹적인 사상 체계였다.
나폴레옹의 침략이 안겨준 충격은 단순한 군사적 패배가 아니었다. 그것은 '천 년의 질서'가 '새로운 질서' 앞에 무력하다는, 존재론적 패배의 선고였다.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 믿었던 이슬람 세계는, 자신들이 '변방'일 수 있다는 끔찍한 가능성을 마주했다.
그들이 믿었던 이슬람법(샤리아)은 더 이상 이 급변하는 세상을 명쾌하게 통치하지 못했다. 경제는 뒤처졌고, 정치는 무능했으며, 사회는 병들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마주한 '실패'의 민낯이었다. 자신들의 모든 것이었던 시스템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처절한 현실 인식.
고통스러운 자각: "우리는 왜 실패했나?"
이 심각한 패배와 예기치 못한 도전 앞에서, 중동의 무슬림들은 깊은 고뇌에 빠진다. "우리는 왜 이토록 무력해졌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그들의 '자각'이 시작된다. 그들은 병의 원인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즉 '자신들'에게서 찾기 시작했다. 그들의 진단은 명확했다. "우리가 이슬람의 근본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이다."
한때 세상을 호령했던 이슬람의 영광은 꾸란의 순수한 가르침을 따랐을 때 가능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타락하고 나태해져 그 근본정신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 고통스러운 자각 속에서, 그들은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기 위한 두 갈래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하나는 서구의 방식을 '모방'하여 그들을 뛰어넘으려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구의 방식을 '거부'하고 순수한 근본으로 '복귀'하려는 길이었다.
첫 번째 길: 적의 무기를 빌리다 (아랍 민족주의)
첫 번째 길은 '아랍 민족주의(Arab Nationalism)'로 나타났다. 이는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정체성보다 '아랍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에 주목한 사조였다.
그들은 서구가 '민족국가(Nation-State)'라는 강력한 틀로 세계를 제패했음을 목격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흩어진 아랍인들을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 즉 단일 국가로 묶어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아랍인의 통합을 외친다는 점에서 '범아랍주의(Pan-Arabism)'와 맥을 같이했지만, 단순히 통합을 넘어 서구 제국주의의 개입을 차단하고, 낡은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는 강력한 정치적 동력이었다.
19세기 말,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근대화 개혁을 명분으로 중앙집권화를 시도하며 아랍 지역의 자치권을 억압하자, 이에 대한 저항으로 민족주의는 더욱 힘을 얻었다. 이것은 이슬람의 '실패'를 정치공학적, 세속적 방식으로 극복하려던 몸부림이었다.
두 번째 길: 근원으로 돌아가다 (이슬람 근본주의)
그러나 더 깊고 거대하게 타오른 불길은 두 번째 길, '이슬람 근본주의(Islamic Fundamentalism)'였다. 이슬람 원리주의라고도 불리는 이 운동의 외침은 단순명료했다. "꾸란의 가르침대로, 예언자의 시대로 돌아가자."
이들은 서구 문명 자체가 '병폐'이며, 서구의 사상, 기술,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슬람 공동체를 파멸로 이끄는 독이라고 규정했다. 그들에게 개혁은 '서구화'가 아니라 '이슬람화'였다.
이슬람 부흥 운동, 혹은 이슬람 개혁 운동이라 불리는 이 흐름은 이미 9세기 아바스 왕조 시대에도 존재했으나, 19세기의 거대한 '실패' 앞에서 폭발적인 생명력을 얻었다. 그 시작은 꾸란의 엄격한 가르침을 주창한 와하브파였고, 이 순수한 정신은 1920년대 말, 이집트에서 ‘하산 알반나’에 의해 설립된 '무슬림 형제단'으로 이어진다. 이는 단순한 종교 운동을 넘어, 범이슬람주의를 표방하는 거대한 정치·사회 단체로 성장했다.
실패한 조화, 절정에 달한 복귀
20세기 초중반까지만 해도, 이슬람 세계 안에는 '조화론(Harmony theory)'이라는 흐름이 존재했다.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과 가치관을 이슬람의 틀 안에서 수용하여 근대화를 이루어내자는, 일종의 온건한 타협안이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처참히 실패한다. 서구 열강은 조화와 협력의 대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중동을 간섭하고 개입하며 석유를 약탈하는 침략자였음이 드러났다. 기대했던 근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남은 것은 서구에 대한 깊은 배반감과 상처뿐이었다. '조화'는 '굴종'의 다른 이름임이 확인되었다.
이 거대한 좌절감 속에서, 아랍 민족주의의 세속적 실험마저 힘을 잃기 시작하자, 비어버린 그 자리를 '이슬람 근본주의'가 무섭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1979년, 이란에서 호메이니가 이끈 이슬람 혁명은 이 모든 흐름의 절정이었다. 친미 팔레비 왕조의 세속 정권이 무너지고, 꾸란을 헌법으로 삼는 '이슬람 공화국'이 탄생한 것이다. 이는 전 세계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에게 "우리의 방식이 승리할 수 있다"라는 강력한 확신을 심어주었다. 초기 이슬람의 순결한 정신과 도덕을 회복하는 것, 꾸란과 순나(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의 불가침성을 인정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혁명으로 증명해 낸 것이다.
이 혁명은 시아파가 주도했지만, 그 충격파는 분파를 넘어 수니 무슬림들에게까지 강력한 영감을 주었다. 이슬람 근대화의 실패가 가져온 경제 침체, 정치 불안, 도덕적 붕괴라는 좌절감을 극복할 유일한 이념으로 '이슬람 원리주의'가 확고히 자리 잡게 되었다.
튀르키예의 역설: 거부와 복귀의 공존
이 거대한 '실패'와 '자각'의 역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살아있는 현장이 바로 튀르키예공화국이다. 수백 년간 이슬람 세계의 리더(오스만제국)였던 튀르키예는, 1923년 공화국 건국 당시 중동 아랍 국가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선택했다.
건국 영웅 아타튀르크는 이슬람의 '실패' 원인을 이슬람 그 자체로 보고, '탈 이슬람화'와 '강력한 세속주의'를 건국이념으로 삼았다. 이슬람의 정치 개입을 헌법으로 금지한, 국민 대다수가 무슬림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비(非) 이슬람적인 국가를 세우려 했던 거대한 실험이었다.
그러나 20세기 말, 이 세속주의 실험이 경제 악순환과 정체성의 혼란을 해결해 주지 못하자, 튀르키예의 영혼은 다시 '근본'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에르도안'과 그의 정의발전당(AKP)이다. 강한 이슬람 성향을 내세운 그들은 20년 넘게 집권하며, 아타튀르크가 세운 공화국 건국이념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이는 튀르키예 내부의 거대한 도전인 동시에, 중동 외교 무대에서 튀르키예의 입지를 '이슬람의 보호자'로 재정립하려는 시도이다. 튀르키예의 역설은, 이슬람의 '실패'를 극복하려던 세속주의의 '실패'가, 다시 '이슬람 근본으로의 자각'을 불러왔음을 웅변하고 있다.
실패한 영혼이 찾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오늘날 마주하는 중동의 수많은 사태, 서구에 대한 극단적 반감, 심지어 '이슬람국가(IS)'와 같은 비극적 일탈의 탄생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난 150여 년간 이어진 이슬람 세계의 처절한 실패의 경험과 그 실패를 극복하기 위한 '자각'의 몸부림이 낳은 결과물이다.
과거의 화려했던 영광에 대한 동경, 기독교 서구 문명의 압도적 강대함에 대한 분노, 그리고 역사의 흐름에서 낙오되었다는 깊은 불만.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그들을 '근본'으로 내몰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중동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 개인, 혹은 한 문명이 자신의 존재 이유였던 '중심'을 잃어버렸을 때, 그 거대한 공허함을 무엇으로 채우려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다. 그들은 그 답을 '가장 순수했던 처음'에서 찾으려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