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참으로 모순된 말이다.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부르듯 전쟁은 또 다른 전쟁을 부른다. 그러므로 전쟁을 통해 평화를 지킨다는 말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인간은 왜 그 불가능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쟁을 하는 것일까? 불행히도 인간은 오늘의 강요된 평화를 내일에 분출될 투쟁보다 선호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런 본성이 표출되는 과정은 단순하다. 오늘 당장 힘이 약한 국가는 강대국의 식민지가 된다는 것이다.
인류역사를 보면 전쟁의 희생자인 약자는 죄인 아닌 죄인이었다. 약자는 항상 강자의 먹잇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자에 의해 제멋대로 찢겨져 온 폴란드의 역사는 이를 단적으로 입증한다. 폴란드는 투르크 및 스웨덴과의 전쟁을 거치면서 국력이 쇠퇴해지자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3국이 점진적으로 폴란드를 침입하였고 그 결과 폴란드는 1795년부터 1918년까지 123년 동안 3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폴란드 민족의 독립운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1853년 크림전쟁(Crimean War)이 발발했을 때였다. 러시아가 크림반도의 흑해를 놓고 오스만투르크,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사르데냐 연합군과 전쟁을 벌이자 이를 계기로 하여 폴란드의 망명단체들은 의용군을 조직하여 대 러시아전에 나서려 하였다. 그러나 망명단체 지도자들의 내분으로 의용군은 제대로 조직조차 갖추지 못했다.
거기다 1850년대 초, 흉년이 들고 연이어 홍수가 나고 전염병이 창궐하는 등, 자연적 재해가 겹치자 농민들의 생활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해졌다. 그 결과 농촌의 사망률이 증가하고 그에 따라 인구가 감소되자 산업 활동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폴란드는 그런 어려운 시간을 겨우 넘기고 185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크라쿠프(KrakEw)와 르부프(LwEw) 간에 철도를 부설하기 시작했다.
경제회복과 더불어 독립운동도 재개되었다. 1861년에 들어서면서 반러시아 여론이 크게 분출되자 농업협회는 러시아 정부에 농민해방을 촉구하기도 했다. 러시아 정부는 여론이 나빠지고 시위가 빈번히 일어나자 폴란드인들을 달래기 위해 폴란드인들이 싫어하던 내무국장 무하노프(Muchanov)를 직위해제하고 비엘로폴스키(WieloPolski)를 문화교육국장으로 임명했다. 그래도 폴란드의 독립운동이 계속 치열해지자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1863년 2월 알벤슬레벤(Alvensleben)을 페테르부르크에 보내 러시아와 이른바 “알벤슬레벤 협약”을 체결했다. 그 협약에 의하면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폴란드 반군이 다른 지역으로 넘어올 경우 국경을 무시하고 추격할 수 있는 권리를 상호보장했다.
폴란드 독립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1905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1908년에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Bosnia)를 합병하고, 1912년에 발칸전쟁이 일어나면서 유럽이 전운에 휩싸였을 때였다. 그 당시 폴란드 민족운동단체들이 독립을 위해 선택할 수 있었던 길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민족민주당이 주장한 것처럼 러시아의 보호하에 폴란드 자치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독일에 협력하여 폴란드 자치권을 최대한 확대하는 것이었고, 마지막은 오스트리아의 지원 하에 폴란드 자치국가를 오스트리아의 제국 내에 건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폴란드 지도층들은 서로 물고 뜯기에 바빴다. 민족민주당은 러시아와의 통합이 폴란드 자치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폴란드 사회당은 오로지 무장투쟁만이 폴란드의 독립과 사회혁명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대립 속에서 정쟁과 파업이 계속되고 국내가 불안해지자 차르 니콜라이 2세는 국민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1905년에 노조를 합법화하고, 의회제도와 헌법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906년 제정된 헌법은 폴란드의 국내 상황을 크게 개선시키지 못했고, 폴란드 사회당 내부에서는 당 노선을 둘러싸고 분열 조짐이 일어났다.
폴란드가 지난 100여년간 겪어온 위와 같은 참담한 불행은 바로 약자라는 죄였다. 1795년부터 1918년까지 123년 동안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3국의 지배를 받았던 것 역시 “힘없는 죄”의 대가였다. 그래서 역사는 증언한다. “가장 무서운 죄는 힘없는 죄”이고, 힘없는 약소국은 침공의 대상이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고. 우리 모두 이 냉엄한 역사의 증언을 잊지 말자.
-손 영일 컬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