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설의 시대 - 정치인의 언어가 여론을 움직이고 사회를 재구성하다
“정치인의 말 한마디가 나라의 분위기를 바꾼다.”
이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선거철이 되면 후보들의 연설은 뉴스의 중심이 되고, 한 단어의 실수나 문장의 뉘앙스가 여론의 흐름을 바꾼다.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는 언어를 “권력을 드러내는 형태”라고 봤다.
그가 말한 ‘담론’은 단어 그 자체보다, 누가 어떤 말을 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사회적 규칙이다.
즉, 정치인의 연설은 단순히 말이 아니라 권력의 실천 행위다.
이 글은 푸코, 비트겐슈타인, 하버마스 같은 철학자들의 시각을 빌려
“언어가 어떻게 권력이 되고, 사회를 바꾸는가”를
현대 정치의 맥락에서 쉽게 풀어본다.
푸코는 “권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언어 속에 숨어 있다”고 말했다.
정치 연설은 바로 그 ‘숨은 권력’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예를 들어, 정치인이 “국민 여러분”이라고 말할 때, 그 단어는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대표’와 ‘피대표자’를 나누는 언어적 장치다.
연설문 속의 단어들은 어떤 계층을 포함시키고, 어떤 집단을 배제한다.
이런 이유로 푸코는 언어를 “사회를 설계하는 도구”로 보았다.
그의 관점에서 정치인은 단어를 선택하는 순간, 이미 하나의 권력 구조를 짜고 있는 것이다.
결국 “어떤 말이 가능하고, 어떤 말이 금지되는가”가 그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을 말해준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은 “언어의 의미는 그것이 사용되는 방식에 있다”고 했다.
그는 말을 ‘게임’에 비유했는데, 규칙이 다르면 같은 단어라도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정치인의 연설은 바로 이 ‘언어 게임’의 대표적인 사례다.
예를 들어, “개혁”이라는 단어는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뜻이 된다.
어떤 이에게는 ‘새로운 시작’이고, 다른 이에게는 ‘기득권에 대한 공격’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 보면, 정치인은 언어 게임의 설계자다.
그들은 말의 규칙을 정하고, 청중은 그 게임에 참여한다.
따라서 연설의 힘은 ‘진실’보다 ‘사용된 언어의 방식’에 달려 있다.
한 문장의 리듬, 단어의 반복, 감정의 톤이 여론의 향방을 결정한다.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는 ‘공론장(public sphere)’이라는 개념으로 유명하다.
그는 “민주주의는 시민의 대화 능력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하버마스의 시선에서 보면, 정치인의 연설은 민주적 담론의 출발점이 될 수도, 독백이 될 수도 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청중 없는 연설’이 아니라, ‘대화 가능한 언어’에서 태어난다.
그는 “합리적 의사소통”을 강조했다. 즉, 말은 설득이 아니라 이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현대 정치의 언어는 종종 반대 방향으로 흐른다.
연설은 길어지고, 대화는 짧아진다.
하버마스의 말처럼, 시민이 말할 권리를 되찾을 때 비로소 사회는 건강해진다.
이제 연설은 단상 위가 아니라,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이루어진다.
정치인의 언어는 짧고 자극적인 문장으로 편집되어, SNS 알고리즘을 타고 확산된다.
“짧을수록 강하다”는 이 법칙 아래, 언어는 점점 단순해지고 감정적이 된다.
이 현상은 푸코가 말한 ‘권력의 재구성’이자, 새로운 형태의 담론 통제다.
이제 누가 말을 하느냐보다 ‘무엇이 노출되는가’를 결정하는 알고리즘이 새로운 권력이 되었다.
언어는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 힘은 이제 사람보다 기술의 손에 더 가깝게 놓여 있다.
정치의 무대가 바뀐 지금, 철학적 성찰 없이 언어를 소비하는 것은
‘말의 힘’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다.
푸코가 말했듯, 언어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권력의 형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사용이 곧 의미라고 했고, 하버마스는 대화를 민주주의의 근간으로 보았다.
이 세 철학자의 생각을 정치의 현실에 비춰보면,
정치 언어는 단지 선거용 문장이 아니라 사회를 움직이는 설계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언어를 듣고 해석하는 시민의 철학적 감수성이
민주사회의 품격을 결정한다.
오늘의 정치 연설을 듣는 우리의 질문은 단 하나면 충분하다.
“그 말은, 누구의 세상을 만드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