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사를 왜 굳이 삼국사기로 읽어야 하나?
우리는 흔히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는 자부심을 곧잘 표현한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전해지고 있는 관찬 사서는 달랑 ‘둘’밖에 없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즉 고리 인종 때 김부식이 편찬하였다는 “삼국사”와 조선이 개국하고 나서 한참 지난 후인 조선의 문종 1년(1451년)에 편찬된 “고리사”를 들 수 있다. 물론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고리사절요를 거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삼국사와 고리사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또 어떤 이는 “조선왕조실록”이 있지 않냐고 항변하지만, 실록일 뿐 ‘사서’는 아니다.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삼국유사를 사서로 생각한다. 삼국사에 없는 한국 고대사를 비롯한 역사적 설화 등을 다룬 점에서 사서로 착각할 수도 있지만, 시대적 서술로 정리된 것도 아니요, 체계적 구조가 수립된 것도 아니어서 사서(史書)로 평가할 수는 없다. 다만 설화 자체가 역사적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자료임에는 틀림 없지만, 한 마디로 딱 잘라 말하라면 우화집, 특히 불교적 우화와 신화적 이야기를 수집한 설화집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 역사에 미친 폐해가 심대하여 다른 기회에 여러 번 다루어질 것이다.
한편, 서양은 모르겠지만, 동양에서는 전 국가의 역사를 다음 시대를 잇는 국가가 실록을 정리하여 사서로 편찬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럼에도 국가를 대표하는 정부에서 조선시대를 정리하는 사서, 즉 조선사가 없다는 사실은 경악스럽다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다. 아무리 광복하면서 정치적 혼란, 그 정부가 안정을 찾기도 전에 6.25전쟁의 발발, 계속 이어지는 정치와 사회의 혁명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저 수없이 많은 대학은 무엇을 하였던가?
악질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앞잡이 역할을 수행한 일본사학자들의 왜곡을 바로잡지도 못하고, 간단하기 이를 데 없는 사서의 서명을 바로잡지도 못하였으며, 현대인을 위한 번역도 못했던 대학*은 사학을 망치는 일선에 서있던 것은 아닐까, 의심조차 들게 된다. 소위 식민사관이라는 국권상실기 일본인들의 악의적 역사해석을 전혀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은 온 국민이 질타한 지 오래지만, 용어의 사용조차 정리되지 못하고, 계속 흐트러진 상태로 방치한다는 사실은 분노를 느끼게 한다. 말이 지나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해드릴 말씀은 ‘역사와 말이 생각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 김종권이라는 분이 1960년에 번역본을 출간하였음에 비하여, 소위 우리나라 사학계의 태두라는 이병도는 1983년에야 비로소 을유문화사를 통하여 처음 번역본을 출간하였다.

삼국사기는 일본인들의 악의적 조작
‘삼국사기’라고 일본인들이 조작한 김부식의 ‘삼국사’는 맨 앞에 소개하는 사진처럼 우선 표지가 삼국사로 되어 있다. 예전에는 ‘삼국사기’라고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등장하는 대표 사진이 바로 그 사진인 것이었다. 그러더니 오재성선생과 같은 소위 재야사학자들에 의하여 1980년대부터 서명을 잘못 부른다는 지적이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지면서, 그 목소리가 커져 갔다. 그 원성이 부담스러웠던가 슬그머니 그 사진은 사라지고 이제는 거의 검색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삼국사기’라고 표지가 되어 있는 ‘삼국사’를 앞세우고 있다. 특히 영조께서 어렸을 때 역사 공부에 사용하였다는 유물이 2017년 대구에서 발굴되었다며 대대적으로 홍보되었고, 그 신문기사를 앞세워 자신들의 정당성을 ‘호도(糊塗)’할 뿐, 근본적인 조치를 시행하지 않고 있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런 문제를 바로잡기 위하여도 국민들의 의지가 필요한지 의심된다.
바로잡지 않고 으뜸정보원에 핑계대던 일부 국내 사학계
동양인들에게 ‘사기(史記)’라는 사서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삼국사기’라는 오해가 시작되었을 것이라 추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문화에 취약한 일본인들이 간악한 그들 자신의 모국 침탈을 정당화하려는 수작의 일환이었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앞서 언급한 영조와 관련된 ‘삼국사기’(국민일보 2017 1 30 삼국사기 등 4건 대구지정문화재로 지정)이전에 그런 말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진 바 없다. 그러다 1909년 釋尾春芿이라는 자가 50권으로 되어 있는 삼국사를 최초로 현대식 활자를 이용하여 ‘삼국사기’로 출판한 것이 최초였다. 그 뒤 1912년 坪井九馬三이라는 자가 또 ‘삼국사기’라고 출판하였다. 그런데 1913년 훗날 친일파로 매도당하게 되는 최남선선생이 무슨 생각에서 ‘삼국사기’라는 제호로 출판하므로 대못을 박은 꼴이 되었다.
‘꾸짖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속담이 있다. 역사를 식민사관으로 뒤집은 일본 군국주의 사학자보다 광복 이후 백년이 다 되어 가도록 바로잡지 못하는 우리 사학계가 군국주의자들의 개 역할하던 일본인 사학자보다 더 문제는 아닐까?
‘삼국사기’를 고치라는 반발이 거슬리자, 일부 사학계는 ‘으뜸정보원’이라는 엄청 생소하여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별스러운 무기를 들고 나섰다. 이 글을 쓰려고 새삼스럽게 ‘으뜸정보원’을 검색해 보았으나, 제대로 검색되지 않았다. 이제는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 어휘조차 필요없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으뜸정보원’이란,
발상은 아마도 일본인에서 나왔을 듯하다(이 생각은 순전히 개인의 추정이니 독자들께서는 너무 나무라지 마시기 바란다). 우리나라는 책이 많기로 동양의 으뜸이었음은 ‘고리사’에서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선종 8년 송나라<6대 신종>가 고리에 요청한 책이 128종 5,697권이나 된다.) 어쨌거나 문화가 가장 떨어진 일본에는 책이 귀하여 표지가 없는 책이 많았던지, 서명을 정하는 원칙이 첫번째가 ‘표제지’(본문 앞의 저자, 편자, 발행자가 모두 표시된 면), 두번째가 ‘판권기’, 그 다음이 비로소 ‘표지’, ‘판심 어미’, ‘권두(본문의 첫장)’의 순이라고 규정하였다. 그것을 우리나라가 왜 따라하는지 모르겠지만, 표지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삼국사를 제쳐놓고 굳이 표제지에 있는 ‘삼국사기’로 책 이름을 삼겠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정당한 것이라면, 고리사는 서명으로 삼을 만한 것이 없다. 권 46까지는 세가, 47~85는 지, 86~87은 표, 87~137은 렬전이니 어느 것도 서명으로 선택할 수 없다. 즉 고리사 대신에 ‘세가’, ‘지’, ‘렬전’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서가 말한다. 이제라도 ‘삼국사’로 환원하라
아무리 화려한 변명을 하더라도 편찬자인 김부식이 편찬을 명령한 인종에게 올렸다는 ‘고리사’ 기록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 고리사에는 김부식이 스스로 삼국사를 찬술하였다고 명시되어 있다. 더 이상 사학자들이 무슨 말로 ‘삼국사기’라고 주장하겠는가? 조상국가인 우리나라를 집어삼킨 군국주의자들의 개가 되었던 일본인학자들의 식민사관으로 만든 엉터리 용어를 지속할 명분은 어디에도 없다. 고리사 권27 인종 23년 12월 기사가 그것이다.
仁宗 (乙丑) 二十三年 十二月 壬戌 金富軾進所撰三國史.
인종 (을축) 23년 12월 임술 김부식이 자신이 찬술한 “삼국사”를 바쳤다.
뿐만아니라 김종직(金宗直)이 편찬하였다는 동문수(東文粹) 권1에, 고리사 그 자체에서는 읽을 수 없던 김부식의 진삼국사표(進三國史表)를 볼 수 있다. 즉 자신에게 삼국사 편찬을 명령한 인종께 편찬을 완성하였음을 아뢰는 보고문이 진삼국사표다.
다만 서거정이 편찬하였다는 동문선 권44에는 ‘진삼국사기표’라고 하였다. 서거정이 왜 굳이 삼국사기라고 하였을까, 근거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차이로 보아 서거정은 무엇인가 변조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 동문수 | 동문선 |
| 進三國史表 | 進三國史記表 |
| 臣富軾 | 臣某 |
| 命臣編集 | 命老臣傳之編集 |
| 通詳 | 通而詳 |
| 况惟 | 況惟 |
| 勤掩卷 | 勤淹卷 |
| 往行幽 | 往事幽 |
| 自愧耳 | 自媤耳 |
특히 동문수는 臣富軾이라 하였음에 비하여, 동문선은 臣某라는 애매한 용어 선택과 굳이 바꾸지 않아도 될 글자 바꿈으로 보아 서거정의 글은 신뢰성을 결여하였다고 판단된다. 왜 그랬을까?
끝으로 사족이 될지 모르겠지만, 내지(內紙)에 ‘三國史記卷第OO’라고 한 것은 ‘삼국사를 적는(기록하는) 제OO권’으로 해석해야 마땅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