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망은 선택이다 - 인간의 고통과 의미를 잇는 프랭클의 철학적 유산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정신적으로는 오히려 더 공허하다.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다시금 사회 곳곳에서 울린다.
이 물음은 단순한 개인의 고민을 넘어, 실존의 위기 그 자체다.
19세기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미 “절망은 인간의 본질적 조건”이라 말하며, 인간이 신앙과 자기실현 사이에서 겪는 불안을 실존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그리고 20세기,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은 이 철학적 유산을 ‘로고테라피(Logotherapy)’라는 심리학적 치료로 확장했다.
프랭클에게 있어 고통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통로였다.
오늘날, 그들의 사상은 다시 우리에게 묻는다. “절망의 시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선택할 수 있는가?”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를 자각할 때 느끼는 불안을 ‘실존의 진통’이라 불렀다.
그에게 절망은 단순히 고통스러운 감정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통로였다.
“절망은 나 자신이 되고자 하지 않는 상태이며, 그 절망을 자각할 때 인간은 신과 마주한다.”
이 말은 인간이 의미를 상실한 시대에도 희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내면에 지니고 있음을 암시한다.
키에르케고르가 제시한 이 철학적 통찰은 훗날 프랭클의 사유에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된다.
빅터 프랭클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족과 자유를 모두 잃었다.
그러나 그는 그 절망의 한가운데서 인간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단 한 가지를 발견했다.
“모든 것은 빼앗길 수 있어도, 인간이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는 자유만은 빼앗을 수 없다.”
그의 로고테라피는 바로 이 통찰에서 탄생했다.
인간은 환경의 피해자가 아니라, 의미를 창조하는 존재이며, 고통조차도 삶의 이유를 다시 발견하는 기회로 전환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키에르케고르의 ‘신앙의 도약’과 맞닿는다. 인간이 절망을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은, 그 속에서도 의미를 발견하려는 결단에 있기 때문이다.
로고테라피(Logotherapy)는 ‘의미 치료’라는 뜻을 가진다.
프랭클은 정신분석이 과거의 원인을 탐구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로고테라피는 미래의 목적과 의미를 향하도록 인간을 이끈다고 보았다.
그는 환자들에게 “당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다면, 어떤 ‘어떻게’도 견딜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이는 니체의 말 — “삶의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어떤 고통도 견딜 수 있다” — 과 철학적으로 맞닿아 있다.
프랭클의 이론은 단순한 치료법을 넘어, 인간의 존재론적 선언이다.
삶의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아야 하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은 고통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프랭클은 절망의 끝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켰다.
수용소에서 하루하루 죽음과 마주하며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내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가?”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렇다.”
희망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내면의 결단이다.
이것이 바로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신앙의 도약’이자, 프랭클이 말한 ‘정신의 자유’의 본질이다.
오늘날의 불확실한 시대 속에서도, 인간이 자기 존재의 이유를 묻는 한 로고테라피의 철학은 여전히 살아 있다.
키에르케고르가 절망 속에서 인간의 가능성을 보았다면, 프랭클은 그 가능성을 실제로 살아낸 사람이다.
그들의 사상은 서로를 비추며 “고통은 의미로, 절망은 희망으로 변할 수 있다”는 인간의 위대한 능력을 증언한다.
로고테라피는 단지 심리치료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존엄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는 실존의 철학이다.
오늘도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희망은 감정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절망의 밑바닥에서조차 ‘살 이유’를 찾아 나서는 순간, 인간은 이미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