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고 싶다는 농담"이라는 제목을 처음 들으면, 모순처럼 느껴진다.
살고 싶다는 말은 절박한 생존의 의지인데, 여기에 ‘농담’이라는 단어가 붙는다니.
하지만 허지웅은 이 책에서,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는 인간의 마지막 존엄을 이야기한다.
그가 말하는 농담은, 절망을 덮기 위한 가벼운 말이 아니라, 끝까지 인간답게 버티려는 태도다.
허지웅은 오랫동안 방송인으로, 작가로, 암 생존자로 살아왔다.
《살고 싶다는 농담》은 그가 림프종 투병 이후 세상과 다시 마주한 기록이다.
그는 병상에서, 그리고 병원 밖에서, “죽고 싶다는 말보다 어렵지만 더 진심인 말”이
바로 ‘살고 싶다’는 말이라고 고백한다.
이 문장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정조이자, 독자가 마주하게 되는 첫 번째 울림이다.
허지웅은 10여 년 전부터 ‘직설적이고 냉소적인 방송인’으로 알려졌다.
그의 말은 종종 차갑고, 때로는 공격적으로 느껴졌지만, 그 밑에는 삶을 너무 일찍 깨달아버린 사람의 쓸쓸함이 있었다.
그가 아팠던 시절, TV와 라디오에서 사라졌을 때, 사람들은 ‘그의 말이 사라졌다’는 사실로 그의 부재를 실감했다.
이 책은 그 ‘사라진 시간’ 이후의 이야기다.
그는 질병이 몸에 남긴 흔적뿐 아니라, 그로 인해 다시 보게 된 인간관계와 세상에 대해 적는다.
그에게 병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다시 세상을 읽는 새로운 언어였다.
허지웅은 절망의 시간을 기록하며, 독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웃을 수 있다는 건, 아직 인간이라는 뜻 아닐까?”
그 질문은 단지 아픈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지친 사회, 상처받은 마음, 불안한 내일을 견디는 모든 이에게 던지는, 묵직한 위로다.
《살고 싶다는 농담》은 다른 에세이와 달리, 눈물보다 유머의 온도로 삶을 버틴다.
허지웅의 유머는 냉소가 아니라, 고통을 감싸는 기술이다.
그는 “세상은 계속 무너지고 있지만, 커피는 여전히 맛있다”는 식으로, 삶의 불균형을 웃으며 받아들인다.
그의 글은 일기처럼 담백하고, 때로는 철학처럼 날카롭다.
문장 하나하나가 개인의 고통을 넘어서 ‘공감 가능한 생존의 언어’가 된다.
예를 들어, 그는 “나는 아프기 전에도 아팠고, 낫고 나서도 아프다”라고 쓴다.
이 문장은 병의 경험을 넘어, 모든 인간의 불완전한 생을 드러낸다.
그는 또 “누군가는 나를 강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단지 버티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여기서 ‘버틴다’는 말은 무력함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희망의 가장 낮은 형식이다.
그의 문장은 화려하지 않지만, 꾸밈없는 진심으로 독자를 설득한다.
그는 ‘위로’를 주지 않는다.
대신, 같이 망가져본 사람의 시선으로, 인간의 복원을 말한다.
그는 “누군가의 슬픔을 가볍게 다루지 말자”라고 말한다.
이 책이 진짜 위로가 되는 이유는, 말로 위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문장은 슬픔을 숨기지 않고, 그것을 드러내는 용기로 독자를 끌어안는다.
결국, 《살고 싶다는 농담》은 단순한 투병기나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인간다움의 마지막 농담”을 기록한 회복의 일기다.
허지웅의 글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그 농담의 주인공이 되어 있다.
살고 싶다는 말은 결코 가벼운 농담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웃을 수 있다는, 인간의 마지막 저항이다.
책을 덮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따뜻해진다.
삶이 조금은 버거워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웃을 수 있다면, 그건 농담이 아니라 진짜 용기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