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공정책신문=김유리 기자] 예산은 정책을 숫자로 표현한 것이며, 지방자치단체가 무엇을 우선하고 누구를 보호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공적 선택이다. 주민참여예산제는 이 중요한 선택 과정에 주민이 직접 참여하도록 함으로써 지방재정의 민주성과 투명성, 책임성을 높이는 제도이다.
주민참여예산제는 더 이상 지방자치단체가 선택적으로 운영하는 행정 프로그램에 머물지 않는다. 「지방재정법」 제39조는 지방자치단체의 장이 예산과정에 주민이 참여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여 시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주민참여예산위원회 등 주민참여기구를 둘 수 있도록 하고, 주민참여예산제를 통해 수렴한 의견서를 지방의회에 제출하는 예산안에 첨부하도록 한 것도 주민의 참여를 지방재정 운영의 공식 절차로 인정한 결과이다.
주민참여예산제는 지난 수년간 전국 지방자치단체로 확산되면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주민의 생활 속 요구를 예산에 반영하고, 행정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지역 문제를 정책의제로 끌어올렸다. 예산 편성 과정이 행정기관 내부의 절차에 머물지 않고 주민에게 공개되면서 지방재정에 대한 이해와 신뢰도 높아졌다.
그러나 제도의 외형적 확대가 곧바로 참여의 질적 성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역마다 위원회의 구성과 운영 방식, 주민제안사업의 심사 기준, 예산학교의 교육 내용, 사업 선정 이후의 평가와 환류 수준이 서로 다르다. 행정의 지원 역량과 지역의 재정 여건에 따라 주민참여의 실질성에도 격차가 나타난다.
「지방재정법 시행령」도 주민참여예산제도의 평가 요소로 주민참여예산기구의 활성화 정도, 실질적인 주민참여의 범위와 수준, 홍보와 교육 지원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주민참여예산제가 사업공모의 규모만으로 평가될 수 없으며, 위원회의 역량과 교육, 숙의의 질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필자는 최근 서울특별시 시민참여예산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면서 주민참여예산제가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가장 절실하게 느낀 과제는 각 지방자치단체 안에 흩어져 있는 주민참여예산위원회의 경험과 지혜를 전국적으로 연결하는 일이다.
현재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의장에게는 「지방자치법」 제182조에 따른 전국적 협의체가 마련되어 있다. 이들 협의체는 지방자치에 관한 공동 현안을 논의하고, 지방자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법령과 정책에 대해 관계기관에 의견을 제출할 수 있다. 행정기관과 지방의회는 전국적 협력체계를 갖추고 있지만, 주민참여예산위원회의 의견을 전국 단위에서 모으고 정부 정책에 전달하는 법정 통로는 현행 법체계에 별도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제도적 비대칭은 개선할 필요가 있다. 예산안을 편성하는 지방자치단체장에게 전국 협의체가 필요하고, 예산안을 심의·의결하는 지방의회에도 전국 협의체가 필요하다면, 예산과정에 참여하는 주민에게도 공동의 의견을 형성하고 전달할 협력체계가 필요하다. 이는 주민참여예산위원회에 새로운 특권을 부여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집행기관과 지방의회, 주민으로 이어지는 지방재정 거버넌스의 균형을 갖추자는 제안이다.
장기적으로는 광역과 기초 지방자치단체의 주민참여예산위원회, 주민대표, 전문가 등이 폭넓게 참여하는 ‘전국주민참여예산협의회’를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전국의 수많은 광역·기초 위원회를 한꺼번에 연결하려 할 경우 대표성의 기준, 회원 구성, 의사결정 방식, 재정 부담 등을 둘러싼 논의가 길어질 수 있다. 제도의 완결성을 기다리다가 협력의 출발마저 늦어져서는 안 된다.
이에 필자는 전국주민참여예산협의회로 발전하기 위한 첫 단계로 ‘전국주민참여예산광역위원장협의회’의 구성을 제안한다.
광역위원장협의회가 우선 필요한 첫 번째 이유는 실현 가능성에 있다.
전국의 기초 지방자치단체 주민참여예산위원회까지 처음부터 모두 참여시키면 조직 규모가 지나치게 커지고, 지역별 운영 방식의 차이로 인해 합의 형성이 어려워질 수 있다. 반면 각 시·도의 주민참여예산위원장을 중심으로 협의체를 출범시키면 책임 있는 대표자를 분명히 할 수 있고, 공동 의제를 비교적 신속하게 논의할 수 있다. 작은 규모의 협력에서 출발하여 운영 경험을 축적한 뒤 참여 범위를 넓히는 것이 안정적이다.
두 번째 이유는 광역위원회의 매개 기능에 있다.
광역지방자치단체는 중앙정부와 기초지방자치단체를 연결하는 중간적 위치에 있다. 교통, 환경, 돌봄, 청년정책, 지역경제, 기후위기 대응처럼 하나의 시·군·구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도 다룬다. 광역 주민참여예산위원회는 기초지역의 다양한 요구를 종합하고, 이를 권역 단위의 정책으로 전환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따라서 광역위원장협의회는 중앙정부의 정책을 지역에 전달하는 하향식 조직이 아니라, 기초지역과 주민의 요구를 광역과 국가 정책으로 연결하는 상향식 통로가 되어야 한다. 각 광역위원장은 자신이 속한 위원회의 의견만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할 지역 기초위원회의 현안과 제안도 충실히 수렴해야 한다.
세 번째 이유는 지역 간 참여 역량의 격차를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일부 지역은 체계적인 예산학교와 숙의과정을 운영하고 있지만, 일부 지역은 주민제안사업을 접수하고 순위를 정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주민이 어느 지역에 사느냐에 따라 예산 참여의 기회와 수준이 크게 달라져서는 안 된다.
광역위원장협의회는 지역별 우수사례를 공유하고, 공동 교육자료와 심사기준을 개발하며, 위원회 운영에 필요한 기본모형을 제시할 수 있다. 주민제안서 작성, 예산서 분석, 사업 타당성 심사, 사회적 약자 보호, 성인지예산, 탄소중립예산, 사업성과 평가 등에 관한 표준 교육과정도 공동으로 마련할 수 있다.
다만 표준화가 지역의 다양성을 억누르는 획일화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전국적으로 필요한 공통 교육과정은 함께 개발하되, 지역의 인구구조와 산업, 문화, 재정 여건을 반영한 선택과정은 각 지방자치단체가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방식이 적절하다.
네 번째 이유는 국가 정책에 대한 주민의 공동 대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방재정 관련 법령과 정부 지침, 주민참여예산 평가기준, 교육정책, 디지털 참여방식 등은 전국 지방자치단체에 공통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각 위원회가 개별적으로 대응하면 현장의 의견이 분산되고 정책적 영향력도 약해진다.
광역위원장협의회가 지역별 의견을 종합하여 정부와 국회에 전달한다면 주민참여예산 정책의 현장 적합성을 높일 수 있다. 정부도 지역별로 흩어진 의견을 각각 청취하기보다 공식 협의창구를 통해 공통 현안을 효율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협의회 구성은 주민과 정부 모두에게 필요한 제도적 소통망이 될 수 있다.
광역위원장협의회의 정당성은 명칭이나 규모만으로 확보되지 않는다. 구성 목적과 대표 절차, 운영 방식이 민주적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각 광역위원장은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기보다 해당 주민참여예산위원회의 의결이나 공식적인 동의를 거쳐 참여해야 한다. 위원장은 주민 위에 있는 권한자가 아니라 위원회의 의견을 전달하는 대표자이자 조정자이다.
협의회가 위원장들의 친목단체나 개인적 위상을 높이는 조직으로 운영된다면 출범의 취지가 훼손된다. 회의 안건은 각 광역위원회와 기초위원회의 의견을 사전에 수렴하여 정하고, 논의 결과를 다시 지역위원회에 보고해야 한다. 회의록과 사업계획, 재정 사용 내역도 공개해야 한다. 임원 임기는 제한하고 지역별 순환원칙을 적용하며, 수도권과 비수도권 사이의 균형도 고려해야 한다.
광역위원장 중심으로 출범하더라도 기초위원회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 광역위원장협의회는 최종적 조직이 아니라 전국주민참여예산협의회로 나아가기 위한 과도적 협력기구이다. 협의회 내부에 기초위원회 의견수렴 절차를 두고, 권역별 간담회와 공동 토론회를 정례적으로 개최할 필요가 있다. 청년, 여성, 고령자, 장애인, 이주민 등 다양한 주민의 목소리를 듣는 참여구조도 마련해야 한다.
단계별 발전 방향도 명확하게 설정해야 한다. 첫 단계에서는 광역위원장들이 자율적인 협의체를 구성하여 공동 규약을 마련하고, 우수사례 공유와 교육, 공동연구, 정책건의 활동을 시작할 수 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광역과 기초위원회 사이의 상시적인 의견수렴 체계를 구축하고, 권역별 네트워크를 활성화해야 한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기초위원회 대표와 다양한 주민대표가 함께 참여하는 전국주민참여예산협의회로 확대해야 한다.
그 이후에는 법률에 근거한 공식기구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지방자치법」 제182조의 전국적 협의체 구조를 참고할 수 있지만, 주민참여예산제도의 직접적인 근거법이 「지방재정법」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전국 협의회의 설치 근거 역시 「지방재정법」에 두는 것이 법체계상 자연스럽다.
법률에는 협의회의 구성과 기능, 대표성 확보방안, 운영의 투명성, 정부에 대한 의견 제출 절차 등을 규정할 수 있다. 정부가 주민참여예산과 관련된 법령이나 주요 정책, 평가기준을 제정하거나 변경할 때 협의회의 의견을 듣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협의회가 정책건의를 제출하면 관계기관이 이를 검토하고 결과를 회신하는 절차까지 마련되어야 주민의 의견이 선언에 머물지 않는다.
주민참여예산협의회는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지방의회의 법적 권한을 대신하는 조직이 아니다. 예산안 편성권은 지방자치단체장에게 있고, 예산안 심의·의결권은 지방의회에 있다. 주민참여예산협의회는 주민의 생활 경험과 정책 수요를 체계적으로 전달하여 집행기관과 지방의회의 판단을 돕는 협력기구이다. 대표민주주의의 권한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숙의민주주의의 장점을 더할 수 있다.
이제 주민참여예산제는 ‘얼마나 많은 주민이 참여했는가’를 넘어 ‘주민의 의견이 얼마나 충실하게 숙의되고 정책에 반영되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참여 인원과 제안사업의 수만 늘리는 방식으로는 제도의 신뢰를 높이기 어렵다. 교육, 숙의, 심사, 정책 반영, 성과평가와 환류가 하나의 체계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개별 지방자치단체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한 지역의 성공 경험을 다른 지역이 배우고, 여러 지역이 공통으로 겪는 문제를 함께 해결하며, 현장의 목소리를 국가의 제도 개선으로 연결해야 한다.
장기적인 목표는 광역과 기초를 포괄하는 전국주민참여예산협의회이다. 그러나 큰 조직의 완성만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우선 전국주민참여예산광역위원장협의회를 구성하여 협력의 첫발을 내디뎌야 한다. 광역위원장협의회는 기초위원회를 대신하는 조직이 아니라 기초와 광역, 중앙을 연결하는 가교가 되어야 한다.
주민참여예산위원회가 서로 고립된 섬으로 남아서는 재정민주주의의 성숙을 기대하기 어렵다. 행정기관과 지방의회뿐 아니라 주민도 전국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지역의 경험이 전국의 공동자산이 되고, 주민의 제안이 국가의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주민참여예산제의 새로운 도약은 거대한 조직의 선언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각 시·도의 경험과 지혜를 연결하는 실천에서 시작된다. 전국주민참여예산광역위원장협의회가 그 현실적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법학박사
▷서울특별시 시민참여예산위원회 위원장
▷(사)한국공공정책학회 부회장
▷(전)국민대학교 행정대학원 외래교수
▷(전)서울특별시의회 전문위원
<저서> 「주민참여예산의 이해와 운영 전략」 (2026,공저) 등 다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