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우(濛雨) / 김종일
칠월의 아침이 부옇게 깨어난다
안개와 비의 경계를 지우며
소리도 없이 마음부터 적시는 그 이름
또렷한 것만이 진실은 아니라고
오늘 비가 나를 타이른다
꿈에서도 비가 내린 적이 있다
깨어나면 베개는 말라 있어도
마른 마음 깊은 곳 적셔 두고 간 비
받은 줄도 모르게 받은 은혜처럼
아침이면 까닭 없이 감사가 고인다
이 흐린 칠월에 한 벗을 떠올린다
보이지 않아도 곁을 떠난 적 없는 이
가장 낮은 자리까지 소리 없이 적셔 주는 분
젖는 줄도 모르게 사랑에 젖어
나는 빈손으로 고백한다
— 다 받았으므로, 고맙다고

몽우(濛雨), 받은 줄도 모르게 받은 비에 관하여
이 시를 처음 덮었을 때 마음에 먼저 남은 것은 한 행이었다. "또렷한 것만이 진실은 아니라고." 시는 이 한 문장에서 자신의 미학을 통째로 고백한다. 제목이 몽우, 곧 안개처럼 흐린 가랑비인 까닭이 여기 있다. 또렷함을 진실의 자격으로 삼지 않겠다는 선언이, 윤곽이 풀린 칠월 아침의 첫 장면과 정확히 포개진다. 시는 흐림을 결함이 아니라 또 다른 진실로 끌어올린다. 그 전환이 첫 연에서 이미 조용히 완성된다.
이 시의 울림은 한 동사에서 온다.
'적시다'이다. 비는 내리지 않고 적신다. "소리도 없이 마음부터 적시는 그 이름"에서 보듯, 시인은 비의 낙하나 소리를 그리지 않고, 스며드는 촉감과 그 침묵을 택한다. 청각의 부재("소리도 없이")가 도리어 촉각("적시는")을 깨우는 자리에서, 이 시의 감각은 안으로 향한다. 비는 풍경이 아니라 사건이다. 바깥에서 일어나지 않고 마음 안쪽에서 일어난다.
진짜 솜씨는 두 번째 연의 모순에 있다.
"깨어나면 베개는 말라 있어도 / 마른 마음 깊은 곳 적셔 두고 간 비." 베개의 마름과 마음의 젖음을 한 호흡 안에 맞세운 이 대구는, 보이는 것과 받은 것이 어긋나는 자리를 정확히 짚는다. 그래서 다음 행이 가능해진다. "받은 줄도 모르게 받은 은혜처럼." 이 시 전체를 떠받치는 핵심 은유, 곧, 비=은혜의 변주가 여기서 처음 본모습을 드러낸다. 은혜의 본질은 그 작용이 인식보다 앞선다는 데 있다. 받은 줄 모르게 이미 받았으므로, 감사는 의지가 아니라 "고이는" 것으로 온다. '고인다'라는 동사가 빛난다. 솟거나 터지지 않고, 낮은 데로 모여 천천히 차오른다. 감사의 물리학이 비의 물리학과 같아진다.
세 번째 연에서 시는 한 단계 도약한다.
비는 마침내 한 인격으로 번진다. "보이지 않아도 곁을 떠난 적 없는 이 / 가장 낮은 자리까지 소리 없이 적셔 주는 분." 자연 현상에서 은혜로, 은혜에서 '그분'으로 이어지는 이 상승은 무리가 없다. 비가 처음부터 가장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물성을 지녔기에, 가장 낮은 자리를 적시는 사랑으로의 비약이 억지스럽지 않다. 은유가 신학을 끌고 오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결이 스스로 그곳에 닿는다.
그리고 마지막. "나는 빈손으로 고백한다 / — 다 받았으므로, 고맙다고." 다 받은 사람의 손이 비어 있다는 이 역설이 시의 무게중심이다. 줄표 하나가 만든 짧은 침묵 뒤에 직접화법이 놓이면서, 독백이던 시는 끝내 한 분을 향한 말 건넴으로 돌아선다. 비가 그렇듯, 가진 것을 움켜쥐지 않고 흘려보낸 손만이 다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받음과 비움이 한 동작이 되는 자리에서 시는 닫힌다.
이 시는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 감사라는 말을 외치는 대신 감사가 고이는 속도를 보여 주고, 사랑을 설명하는 대신 젖는 줄 모르게 젖는 촉감으로 그것을 만지게 한다. 흐림 속에서 더 깊이 닿는 진실이 있다는 것을, 시는 끝까지 또렷하게 말하지 않음으로써 증명한다. 그러니 묻게 된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받은 줄도 모르게 받아 두고 살아가는가.
이 시의 미덕은 '적시다'라는 한 동사를 비에서 은혜로, 은혜에서 사랑으로 일관되게 변주하면서도, 끝내 감정을 외치지 않고 흐림과 침묵의 미학으로 가장 낮은 곳에 닿게 한 절제에 있다. 받음과 비움을 한 동작으로 묶은 마지막 역설이, 이 짧은 3연을 매우 귀한 자리로 끌어올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