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이 기억해야 할 날 -6월 26일

대표적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암살일

출처: 라떼뉴스

 

 1949년 6월 26일은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님이 암살당해서 돌아가신 날이다. 거의 모든 한국인이 아는 대표적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님이 해방 후 한국인에게 암살당했다. 

 일제강점기 일제가 백범 김구 선생님을 잡기 위해 내 건 현상금은 60만 원(위안)이었다. 이는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200억 원에서 350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일제가 너무도 잡고 싶어 했을 만큼, 누구보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기도 하다.

 백범 김구 선생님은 중국에서 독립운동 중 부인, 아들 어머니를 잃은 고통도 겪었다. 그런 고통 속에서도 독립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고 해방될 때까지 할 수 있는 모든것을 다하셨다.

출처: 정용욱 교수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환국과 백범 

(https://www.kimkoomuseum.org/upload/7%EC%A7%91-1%20%EC%A0%95%EC%9A%A9%EC%9A%B1%EA%B5%90%EC%88%98%EB%8B%98.pdf)

 

 그러나 해방된 조국은 입국부터 어려웠다. 임시정부 요원이 아닌 개인 자격 입국부터 미군정에 절대 협조하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해야했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입국하려던 첫 번째 시도는 미군정에 의해 무산되었다. 어렵게 들어온 두 번째 입국은 한국인의 환영을 받지 못하게끔 미군정이 철저히 막았다. 김포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올 때도 자동차 유리로 밖을 보지 못하게 막아버렸다고 한다.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목숨 바치고 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전범국이 아닌 피해국 한국에 미군정이라는 정부를 만들어서 38선 이남 한국을 지배하고 간섭했다. 

 해방된 한국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거대한 세계 권력에 의해 나누어져 통치받았다. 독립은 위해 싸워 온 항일지사들은 당연히 이런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조국이란 온전한 한민족의 나라를 생각했던 것이지, 반쪽 난 나라라고 상상하지도 못했다. 이게 민족주의자 독립운동가들이라면 당연했을 것 같다. 

 

 그러나 권력 추구 이기주의자들은 미국과 소련을 이용하더라도 자기 자리를 만드는 데 급급했던 것 같다. 분단되든 말든 일제강점기처럼 본인만 권력만 가진다면 괜찮다고 생각했던 반민족주의자들이 득세했다. 일제에 붙었듯이 미군정에 붙은 이들에 의해 분단될 위기가 고조되자 김구 선생님은 통일된 한국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 과정에서 김구 선생님이 순진했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필자는 민족주의자 독립운동가의 피눈물 나는 노력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안두희 소령이라는 한국인에게 암살당한다. 이 암살에 대해 백색 테러로 보는 견해가 있고, 배후 세력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왜냐하면 안두희라는 인물이 일개 소령이 그 후에 너무 잘 살았기 때문이다. 일단 1949년 6월 백범 김구 암살 직후 체포된 안두희가 가장 먼저 압송되어 보호받은 곳은 김창룡이 지휘하던 특무대였다. 당시 김창룡은 안두희를 극진히 대우하며 군부의 비호 아래 두었다고 한다.

 

안두희 납품 업체 성황( 출처: 오마이뉴스 https://www.ohmynews.com/NWS_Web/Tenman/Tenman_ins.aspx?cmpt_cd=PT006)

 

 

 또 범행 직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6.25 사변으로 풀려난 뒤 군에서 중위, 대위를 거쳐 소령으로 초고속 특진하고 곧바로 예편했다고 한다. 예편 후 1군사령부 관내 전사단에 공급하는 군납 식료품 공장인 신의기업사(信義企業社)를 강원도 양구에서 1956년 10월부터 10년 정도 창업하여 경영하였다. 살인자가 군납품 업체를 운영할 수 있다니 특혜에 대한 의혹이 당연히 나왔다.

 

 참고로 한국 전쟁이라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미국과 소련 입장에서는 한국 전쟁이 맞다. 그들의 힘겨루기에 한국과 베트남이 전쟁터가 되었기 때문이다. 강대국 미국과 소련은 자국 영토 내에서 전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힘겨루기는 약소국가 영토내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한국을 비롯한 약소국가는 많은 자국민이 목숨을 잃었고 폐허가 된 영토를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 그들은 한국에서 일어난 전쟁은 한국전쟁이고 베트남에서 일어난 전쟁은 베트남 전쟁이다. 억울한 일을 당한 한국인으로서는 6.25 사변이 바르다고 생각한다. 해방 후 무슨 물자가 있다고 전쟁을 벌일 수 있겠는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안두희라는 인물은 1917년 평북 용천 출생으로 해방 후 월남해 서북청년회에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1948년 육군사관학교 8기에 입교했다. 그리고 실리 보고서((Cilley Report)에 따르면, “안두희는 미군 방첩대 요원이자 백의사 자살특공대원”이라고 한다. 

 

 이 실리 보고서도 국가가 아닌 민간인 교수가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찾아낸 것이다. 평생을 한국의 독립과 한민족을 위해 바친 김구 선생님에 대한 암살 규명도 해방된 나라에서 제대로 하지 못했다.

 ‘친일 인명사전’을 제작하기 시작한 임종국 선생님이 계신다. 이분이 배족에 관해 연구하게 된 계기가 김구 선생님을 중국인으로 알았던 자신의 무지에 대한 반성에서부터였다. 해방된 조국은 중국에 오래 살았다고 김구 선생님을 중국인으로 둔갑시켰다. 

 

 친일 부역자들은 분단을 이용해서 일제강점기처럼 호의호식하며 살았다. 그리고 독립운동가에 대해 국민에게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정부 교육 문화 모든것을 장악하고 한국인에게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래도 임종국 선생님처럼 스스로 공부하며 진실을 알리려는 분이 존재했다. 그런 분들 덕분에 우리는 독립운동과 김구 선생님 암살에 대한 한 자락의 진실이라도 쥐고 있는 것 같다. 아니었으면 ‘안두희가 김구 선생님을 암살했다‘로 교과서 한 줄로 끝날 일이었다. 역사는 그렇게 단편적 지식만 암기하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비극적인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안두희 미국 정보 요원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0311124467

 

김창룡 전봉덕 친일부역자

https://news.imbc.com/replay/1992/nwdesk/article/1913205_30556.html

 

https://imnews.imbc.com/replay/1992/nwdesk/article/1913698_30556.html

 

임시정부를 무시한 미군정

 

민족주의자 김구와 미군정 

 

 

작성 2026.06.26 14:05 수정 2026.06.26 14:13

RSS피드 기사제공처 : 약산소식지 / 등록기자: 허예주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해당기사의 문의는 기사제공처에게 문의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