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 6일, 자녀의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심정
아침 7시. 벌써 환하게 밝아온 초여름 햇살을 등지고 자녀의 집에 도착한다. 익숙하게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순간, 오늘 하루 나의 모든 스위치는 '나'에서 '할머니'로 강제 전환된다. 일주일에 무려 6일. 내 집이 아닌 남의 집, 비록 자녀의 집일지라도 그곳으로 출근하는 기분은 묘하다. 밤새 지친 몸을 추스르며 출근을 준비하는 자녀와 교대하고, 나는 거실의 지휘권을 넘겨받는다. 옹알이하는 아기와 어린이집 갈 채비를 하는 첫째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럽다. 하지만 그 사랑스러움이 내 어깨에 얹히는 책임의 무게를 덜어주지는 않는다. 현관문이 닫히고 나면, 자녀가 돌아오는 오후까지 이 공간에 온전한 나의 시간은 단 1초도 존재하지 않는다.
돈을 받는다고 해서 시간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래도 돈 받고 봐주니 다행이네", "요즘 무급으로 손주 보는 사람도 태반인데 복 받은 줄 알아." 틀린 말은 아니다. 자녀는 정당하게 수고비를 치르고, 나는 유급 노동자로서 아이들을 돌본다. 하지만 계좌에 찍히는 숫자가 내면의 공허함까지 채워주지는 못한다. 황혼의 나이는 인생에서 유일하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특권의 시기다. 그러나 유급이라는 명목 아래, 노년의 황금 같은 오전은 매일 자녀의 거실에 저당 잡힌다. 돈을 받기에 불평조차 사치가 되는 현실, 그것이 유급 황혼 육아의 가장 잔인한 덫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족쇄
아이들이 웃을 때면 피로가 녹아내리는 듯하다. 밥을 잘 먹고 예쁜 짓을 할 때면 내가 이 집에 출근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하지만 육아는 감동적인 찰나와 지루하고 고된 시간의 결합이다. 기저귀를 갈고, 놀아주고, 넘어지지 않게 뒤를 쫓는 사이 무릎 관절은 비명을 지른다. 사랑스럽다는 감정과 도망치고 싶다는 육체의 한계가 매일 아침 거실에서 충돌한다. 아무리 예쁜 손주라도, 남은 생애를 담보로 잡힌 채 돌아가는 이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사실 앞에서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오후 6시 반, 퇴근문이 열릴 때까지 나의 이름은 지워진다
아침 7시부터 자녀가 돌아오는 오후 6시 반까지, 나는 투명 인간이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여름 구름을 보며 여유를 부릴 수도, 마음 편히 책 한 줄 읽을 수도 없다. 나의 사회적 자아와 개인적 욕망은 진공 상태에 빠진다. 자녀의 퇴근을 알리는 도어락 소리가 울려야 비로소 나의 시간이 시작되지만, 체력은 이미 방전된 지 오래다. 남은 오후를 생산적으로 써보려 해도, 지쳐버린 몸은 휴식만을 갈구한다.
수많은 '황혼의 동료'들이 겪는 우아한 고립
놀이터나 소아과 대기실에서 마주치는 조부모들의 표정도 나와 다르지 않다. 좋은 유모차를 끌고 단정한 옷을 입었지만, 그 눈빛 깊은 곳에는 비슷한 피로와 고립감이 서려 있다. 자녀의 성취를 돕는다는 명분 아래 스스로의 노년을 유예한 사람들. 우리는 사랑과 의무, 그리고 약간의 금전적 보상 속에서 우아하게 고립되어 간다. 이 고립을 훈훈한 가족애로 포장하지 말자. 현실은 냉정하다.

사랑과 일당 사이,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나
가슴이 답답한 것은 단지 몸이 고되기 때문만이 아니다. 나의 내일이 자녀의 스케줄에 완벽하게 종속되어 있다는 통제력의 상실 때문이다. 유급 노동이라는 합리적 계약 뒤에 숨은, 노년의 주체성 상실이라는 본질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사랑해서 돌보는 것도 맞고, 돈을 받아 책임을 느끼는 것도 맞다. 하지만 그 사이에 '나'라는 개인의 자유는 얼마나 남아 있는가? 이 질문을 외면한 채 내일 아침 7시 또다시 현관문을 연다면, 통장에 쌓이는 돈만큼 마음의 병도 깊어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