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남아공 정치인들의 구조적 무능과 아파르트헤이트의 유산을 가리기 위해 이주민을 희생양으로 삼는 혐오 정치의 실상을 고발하고, 참된 이웃 사랑과 연대의 회복을 촉구하는 마음을 담아 작성되었다.
거울 뒤의 유령, 이주민이라는 희생양
요하네스버그 외곽의 디프슬루트 흑인 거주 구(Township)의 한 평범한 골목은 매일 해가 지면 거대한 긴장감에 휩싸인다. 흙먼지가 날리는 길모퉁이에서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한 사내의 손끝이 가늘게 떨린다. 이웃 나라 짐바브웨에서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피해 국경을 넘은 지 올해로 12년째인 그의 이름은 블레싱이다.
그는 매일 밤 문을 걸어 잠그며 자신이 합법적인 체류 증명서를 가졌는지와 상관없이, 언제든 격렬한 폭력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공포와 마주한다. 거리의 벽면에는 "외국인은 떠나라"는 붉은색 낙서가 선명하게 박혀 있다. 이것은 단지 한 빈민가의 거친 풍경이 아니다. 오늘날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거대한 용광로가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균열하며 내뿜는 차가운 연기다.
1994년 넬슨 만델라가 공포했던 '무지개 나라(Rainbow Nation)'의 위대한 약속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아파르트헤이트(인종 격리 정책)의 사슬을 끊어낸 지 32년이 흐른 지금, 남아공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국가라는 오명을 벗지 못했다. 과거의 영광을 지탱하던 경제적 동력은 멈추어 섰고,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이들이 일자리를 얻지 못해 거리를 전전한다.
이 지정학적 위기의 중심에는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집권 세력의 장기적인 무능이 자리 잡고 있다. 넬슨 만델라의 유산을 이어받은 아프리카민족회의(ANC)는 장기 집권 과정에서 심각한 부패와 관료적 타성에 물들었다. 그 결과 2024년 5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건국 이후 처음으로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며 연립정부(GNU)를 구성하는 정치적 대격변을 맞이했다.
정치 체제의 변화 속에서도 서민들의 삶을 옥죄는 현실은 단 1밀리미터도 나아지지 않았다. 국영 전력 공사 에스콤의 부실 경영이 초래한 장기적인 순환 단전은 공장 가공선을 멈추게 했고, 소상공인들의 생계를 파괴했다. 상하수도 인프라의 노후화로 인해 대도시 한복판에서도 깨끗한 물을 배급받아야 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공공 서비스의 전반적인 붕괴는 대중의 분노를 극단으로 끌어올렸다. 문제는 이 거대한 분노가 구조적 모순의 주범인 정치권력이나 제도적 실패가 아닌, 사회에서 가장 목소리가 작고 취약한 이주민들을 향해 배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실책을 가리기 위해 아주 손쉬운 사냥감인 이주민들을 무대 위로 끌어올렸다.
패트리어틱 얼라이언스(PA)를 비롯한 극단적 민족주의 성향의 정당들은 "이주민들이 남아공 국민의 일자리를 빼앗고 공공 의료와 주거 자원을 축내고 있다"는 거친 선동을 앞세워 표심을 자극한다. 그들은 이주민을 모든 사회악의 근원으로 규정하며 "국경을 전면 봉쇄하고 이들을 강제 추방해야만 나라가 산다"고 외친다.
이 무책임한 수사는 대중의 가난과 박탈감을 자양분 삼아 급격히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통계적 착시이자 거짓이다. 수많은 연구와 경제 지표는 이주민들이 오히려 남아공의 지하 경제를 지탱하고, 내국인들이 꺼리는 저임금 노동 시장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하며 소비를 촉진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진짜 문제는 일자리의 절대적 부족과 교육 시스템의 실패이지, 이주민의 존재가 아니다.
현장에서 만난 이주민들의 정당한 권리와 인간적 존엄성은 매 순간 철저하게 유린당한다. 합법적인 비자를 갱신하기 위해 행정 관청 앞에 며칠씩 줄을 서도, 부패한 관료들은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하며 처리를 미룬다. 거리를 걷다가도 반(反)이주민 자율 설립 단체 회원들에게 둘러싸여 신분증 검사를 당하고 신체적 위협을 겪기 일쑤다.
"우리가 밤낮으로 일해서 버는 돈은 고작 하루 생계를 이어갈 수준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정부와 언론은 나라의 모든 불행이 우리 때문인 것처럼 말한다"라며 눈물을 훔치는 어느 모잠비크 출신 여성의 고백은 이 땅의 도덕적 파산을 고발한다. 그들은 범죄자도, 침략자도 아니다. 그저 생존을 위해 국경을 넘은 우리의 이웃이자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구약성경 신명기 10장 19절은 우리에게 매우 분명하고 추상적이지 않은 명령을 내린다.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이 말씀은 한때 박해받고 억압받던 자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범하기 쉬운 망각에 대한 강력한 경고다.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수많은 남아공의 자유 투사들은 주변 아프리카 국가들의 따뜻한 환대와 피난처 제공이 없었다면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짐바브웨, 잠비아, 모잠비크의 평범한 이웃들이 자신들의 가난을 쪼개어 남아공의 망명객들을 품어주었다. 그러나 권력을 쥔 오늘의 남아공은 그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린 듯하다. 자신들이 과거에 나그네였음을 망각한 사회는 필연적으로 내부에서부터 영적으로 썩어 들어가기 마련이다.
이주민 혐오는 남아공의 상처를 치료하는 약이 아니라, 진짜 원인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마약에 불과하다. 정부가 전력 인프라를 혁신하고, 청년들에게 양질의 기술 교육을 제공하며, 고위층의 부패를 척결하지 않는 한 이주민 수백만 명을 쫓아낸다 한들 가난과 실업은 단 1퍼센트도 줄어들지 않는다.
혐오의 정치는 당장 몇몇 정치인의 표를 모아줄 수는 있겠지만, 결국 국가의 기초를 이루는 공동체적 신뢰와 인간성을 완전히 송두리째 파괴할 것이다.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연약한 자를 희생양 삼아 연명하는 사회에는 결코 미래가 없다.

우리는 이제 거울 앞에 서서 가짜 유령이 아닌 우리 내면의 진짜 일그러진 상처를 직시해야 한다. 다른 이의 얼굴에서 인간성을 지워버릴 때, 가장 먼저 파괴되는 것은 바로 자기의 인간성이다. 진정한 개혁과 회복은 국경을 더 높이 쌓고 이웃을 내쫓는 거친 폭력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 흘러가는 공의와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남아공이 무지개 나라의 찬란한 빛을 되찾을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만든 혐오의 감옥에 갇혀 공멸할 것인가의 갈림길은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에 있는 나그네를 대하는 우리의 손길에 달려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결핍과 실패를 가리기 위해, 지금 가장 낮고 연약한 자의 얼굴에 어떤 낙인을 찍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