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이 알아야 할 독립운동가 김동삼과 일가들

일송 김동삼 독립운동가와 마찬가지로 알아야 할 그 일가 독립운동가들

출처: 대구MBC

 

 1878년 6월 23일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 선생님이 태어나신 날이다. 만주벌 호랑이라 불릴 만큼 항일무장투쟁에서 뛰어나시기도 했지만, 협동학교를 세워 가르침을 주고자 했던 교육자이기도 하다. 

 의병 운동을 하기도 했으나, 국내에서 항일 운동이 어려워지자, 만주로 건너가셨다. 가진 재산을 털어 신흥학교를 세우고 백서 농장을 세워서 독립운동의 기초를 마련하려고 하셨다. 백서 농장을 서로군정서로 발전시켜 청산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청산리 전투에서 청산리전투에서 조카 김성로가 전사했다. 백서농장을 해체하고 삼원포로 귀환한 김동삼 독립운동가는 한족회에서 서무사장을 맡았다. 바로 이어서 그가 서로군정서 참모장으로 취임하였을 때, 김동삼 선생님이 한족회 서무사장 자리를 인계할 정도로 믿었던 조카였다.

 일제가 청산리 전투에 대한 보복으로 서간도나 북간도지역 사는 한인을 무참히 학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 불리는 보복에서 김동삼 선생님은 동생 김동만을 잃었다. 삼원포 삼광학교(三光學校) 교장으로 활약하던 동생 김동만을 살해한 것이다.  

 

 1931년 일본군의 만주침공 직후에 일제 경찰에 의해 피체되었다. 사돈인 이원일(李源一), 경북 영양 출신인 남자현 의사 항일 공작을 추진하기 위해 하얼빈에 잠입했다가 일제 경찰에 피검되었다.

 김동삼 독립운동가는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에 피체된 모진 고문을 받으며 고생하다가 국내로 압송되었다.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의 중형을 받았다. 처음에 평양감옥에서 고생하다가 서울 경성형무소로 옮겨진 그는 만 59세가 되던 1937년 4월 13일(음력 3월 3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사돈 이원일 지사도 1931년경 만주 흑룡강성(헤이룽장성) 하얼빈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다. 1932년 3월 18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김동삼 선생의 가계도

출처: 국가보훈처 (김동삼 독립운동가 가계도)

 

 김동삼 선생님의 장남 김정묵 선생님 역시 타계할 때까지 여러 독립운동 관련 활동에 참여했다. 1921년 1월 베이징에서 신채호(申采浩)·김창숙과 함께 『천고(天鼓)』 발간에 동참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데 노력했고, 김창숙이 주도한 이른바 ‘제2차 유림단사건’을 후원하였다.

 

 아버지 김동삼 독립운동가가 국내로 피체된 뒤에도, 베이징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하던 중 1939년 7월 18일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같은 달 22일 함경북도 경찰부로 호송되어 옥고를 겪었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김정묵 선생님은 지병과 과로 생활의 악조건 등이 겹치며 1944년 4월 19일 57세로 사망하셨다.

 김정묵 독립운동가 동생 김성묵, 김사묵과 아들 김교삼, 김대륙 그리고 조카 김교붕 등이 김정묵 선생님의 유지를 이어받아 의열단 활동에 참가하는 등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고 한다.

 

 짧은 글에 담기 모자랄 만큼 김동삼 선생님과 일가는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독립운동가 집안이 일제강점기가 아닌 해방기에 엄청난 수난을 겪었다. 

 필자가 이번 기사를 쓰게 된 것은, 6월 23일 오늘이 일송 김동삼 선생님이 태어난 날이기도 하지만 얼마 전 읽은 페이스북 글 때문이다. 김동삼 선생님의 후손 김원일님이 쓰신 글을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마음이 너무도 먹먹해졌다.

 이렇게 일제강점기에 가진 재산을 다 털고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했던 집안이 해방 후 친일파가 지배하는 한국에서 눈엣가시였던 듯했던 것 같다. 남한과 북한의 갈려진 상황에서 빨갱이와 내통했다고 몰아서 6촌까지 불러내 일가를 다 죽여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글을 쓴 김동삼 후손 분에 따르면, 아버지가 다섯 살 때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리고 치매에 걸리시고 나서 그 기억 때문에 자꾸 잠꼬대하고 아버지 찾으러 나간다고 하신다고 한다. 게다가 한 번은 진짜 나가신 적도 있어서 그런 아버지를 보며 마음 아파하시고 있다고 한다.

 평생을 눌러 온 억울함이 치매가 걸리시고 나온 게 아닌지 생각이 든다. 해방 후 남한은 독립운동가에게 가혹했다. 김동삼 독립운동가 일가만 몰살당한 게 아니다. 의열단 단장 김원봉 일가도 몰살당했다. 김원봉은 해방된 조국에서 일제 앞잡이 경찰 노덕술에게 온갖 수모를 당하고 북으로 가 버렸다. 그래서 김동삼 일가보다 더 쉽게 분단된 조국의 희생양이 되었다.

 

 친일 앞잡이가 경찰이 되고 군인이 되고 입법 행정을 장악한 나라에서 조국은 그들에게 감사를 표현하지 않았다. 반민족행위자특별위원회를 해체한 날을 현충일로 지정한 나라에서 뭘 더 말할 수 있겠는지 모르겠다.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회를 이루며 사는 인간에게 중요한 능력 중 하나는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생존을 위해 이기적일 수 있지만, 같이 모여 살면서 도우며 살 수 있는 것은 고마움을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 고마워하며 살기에 이기적인 욕망을 앞세울 때 잠시 멈추게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인간이 모여 살아도 동물처럼 약육강식의 사회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걸 모르는 자들이 많은 사회는 정의롭지 못하고 후안무치 행동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반민족행위자에 대해서 옳지 못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벌 받지 않은 자들의 후안무치가 현재도 반복되고 있다.

 

김동삼 후손 김원일 선생님 페북 전문

 

올해 83세인 아버님의 기억 속에서 제가 사라지고 있는것 같아 너무 속상합니다

정말 집안이 역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참으로도 기막히게 온 집안분들이 사셨습니다 일제 강점기 의병으로 시작해서 51년간의 강한 항일 전쟁
남은분들은 철저한 감시대상 한 순간에 잘나가던 집안에서 나라 독립을 위해 모든것을 버리고 죽을 각오로 살아온 집안

일송 김동삼할배가 순국하시고 모든 감시가 더 강해진 가운데 만주에서 돌아가시거나 감시가 덜 심한 일본 심장부 도쿄로 가셔서 지하조직에서 독립을 준비한 친조부~하지만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오셔서 동네 이장을 하셨지만. 45년 이후 낮에는 군인과 경찰이 빨갱이 접촉한 사람들 죽이고 밤에는 산에서 남노당이 동네 습격해서 먹을거 약탈하고~이장에게 배분 시켰을것이다
자료가 남아있는것이 없다

안 그래도 독립운동가 집안은 눈의 가시였을 이승만정권에는 할아버지는 좋은 먹이감이셨을거다 48년 어느 날 낙동강변에서 6촌까지 불러네 같은 날 총살해 강변에 묻었단다 정부에서 빨갱이와 내통한 빨갱이라고 몰아서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정확히 왜 그런 죽임을 당하셨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신 아버지 5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장면을 직접 목격하신거다 그래서 지금도
치매시라 아버지 찾으러 간다시며 자꾸 밤에 잠꼬대를 하신다 하루는 나가신적도 있다

이제 아버님 머리속에는 아들은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고 평생을 그리워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한 장면만 고정된듯 하다

이제 이 손자가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하여~원인을
밝히고자 먼 길을 떠나야할것 같다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하고도 돌아와서 빨갱이 소리를 들으셨을 그 억울함과 한평생 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고 매일 아배요 아배요하셨을 아버님을 위해서라도

이것저것 생각하니 가슴 찟어져 소주한잔에 옛분들은 붓을 드셨지만 전 핸드폰을 드네요

 

 

간도대학살

 

김동삼 독립운동가를 고문한 양영환 친일파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65438

 

 

작성 2026.06.23 21:45 수정 2026.06.24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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