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문학 22 말을 굴려서, 동그랗게 굴려서 (홍성남 외, 몽트)



<책 소개>

 

동서문학 제22은 삶의 다양한 결을 문학으로 길어 올린 작가들의 치열한 사유와 감성을 담아낸 작품집이다. 이번 호는 말을 굴려서, 동그랗게 굴려서라는 표제 아래 시와 수필, 동시, 동화, 소설 등 다채로운 장르의 작품들을 수록하며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내면과 시대의 풍경을 깊이 있게 조명한다.

작가들은 가족과 이웃, 자연과 사회, 상실과 회복의 순간들을 저마다의 언어로 빚어내며 삶의 본질에 다가선다. 때로는 따뜻한 위로로, 때로는 날카로운 성찰로 다가오는 작품들은 문학이 지닌 공감과 치유의 힘을 새롭게 일깨운다.

동서문학 제22은 빠르게 소비되는 시대 속에서도 인간과 삶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놓지 않는 문학의 가치를 보여주는 결실이며,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과 사유의 시간을 선사할 것이다.

 

 

 

<목 차>

 

인사말 동서문학회 회장 홍성남 4

축하글 동서식품() 대표이사 사장 김광수 8

14

수필 66

동시 166

동화 182

소설 202

편집후기 279

 

 

 

<책 속으로>

 

속눈썹이 긴 구름아래 동해를 품은 초저녁달

모래톱 발치에서 어스름이 서걱거려요

 

수면 위 하얀 발자국을 찍으며 별들은 걸어가고

손닿을 듯 다가오는 밤배 한 척

뱃머리에 매달린 등이 나리꽃 봉오리로 피어나요

사공의 노래가 수평선을 넘나드는 사이

해변의 발랄한 청춘들 제비처럼 스쳐가요

 

한때 비키니를 입었던 여인들도

물 주름위에서 초록발자국을 되돌려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을 바라보며

쏟아지는 어둠별 가루를 세어보아요

맨발이 공중부양을 시도하고

양손에 들린 샌들은 새가 되어 날아올라요

-김영애 <갈아 끼우는 풍경> 전문

 

 

느린 걸음으로 세종대왕릉 숲길을 걷는다. 소나무들은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채 낮잠을 즐긴다. 햇살은 푸른 잎을 타고 스르르 미끄러져 내리고, 바람은 발끝으로 흘러간다. 한 걸음 한 걸음, 흙길은 내 발소리를 만진다. 도심을 벗어났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한적함 때문일까.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진다.

명성황후 생가 마당에 닿는다. 기와지붕 아래로 바람이 나릿나릿 흘러내린다. 대청마루에 걸터앉는다. 오래된 나뭇결을 만지니 시간이 멈춘 듯하다. 부뚜막에 걸린 무쇠솥, 헛간에서 두 다리를 쭉 뻗은 쟁기, 흙바닥에 몸을 부린 지게. 장작으로 가득한 고방도 조용히 앉아 바람의 소리를 듣는다.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고, 나도 누구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빠르게 지나간 이들의 자리에서 혼자만의 고요를 즐긴다.

신륵사 다층전탑多層塼塔 아래로 남한강이 흐른다. 계단 끝에 서서 강줄기를 바라본다. 따사로운 봄볕이 물결 위로 쏟아진다. 나처럼 눈이 부셔 미간을 찡그린 걸까. 한겹 한겹 물 주름을 접는다.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끝없이 반복하는 흐름 속에서 나는 여백의 태도를 배운다. 붙잡지 않아도 되는 흘러가도록 두는 지혜를 강은 조용히 말하고 있다.

강줄기를 따라 자박자박 걷는다. 길섶 올망졸망한 개망초들이 하늘하늘 알은체한다. 한바닥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도 함께 몸을 흔든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자연의 언어에 빠져든다. 그래서인지 잊고 지냈던 나를 아주 천천히 다시 만난다.

바쁘게 채우는 삶도 중요하지만, 가만히 멈춰 나를 바라보는 잠깐의 비움이야말로 삶의 중심을 다시 붙잡게 해주는 시작이었다. 더는 채우지 않고 흐름에 나를 맡긴다.

하오의 햇살이 도자기 체험관 유리창 너머를 기웃대다 문우의 뺨을 불그스레 물들인다. 인생의 빛도 곱지만, 붓끝에 담긴 열정 또한 여전히 봄날이다. 누군가는 초록 능선을 그리며 지나온 길을 조용히 되짚어가고, 또 다른 이는 흔들림 없는 필체로 다짐을 새긴다. 하얀 여백에 번지는 색처럼 저마다 가슴 한구석에 쟁여두었던 시간에 잠긴다. 계절이야 흘러갈지라도 마음은 다시 피어난다.

머그잔을 든다. 붓을 쥔 손끝이 살짝 떨린다. 흰 표면에 언제나 봄날이라 쓴다. 그 의미는 삶도 늘 오늘 같은 봄날이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어려운 날들이 지나고 나면 언젠가는 희망의 날이 올 것이라는. 그리고 연분홍빛 날들을 피워낼 마음의 자세다.

여백은 비어 있는 자리가 아닌, 그 안에 쉼과 숨 그리고 작은 떨림과 설렘이 살아 있었다. 이런저런 걱정거리와 성취 사이를 오가며 잊고 지냈던 나를, 여백이 조용히 불러냈다. 다시 채워질 내일 앞에서 나는 더 이상 서두르지 않기로 한다.

머그잔을 책상 위에 살포시 내려놓는다. 단단하게 구워질 나의 봄날, 코스모스 꽃송이가 여백에 기대어 노랑 다홍 웃음 짓는다.

-김선자 수필 <여백, 그 비움의 자리 > 중에서

 

 

세모

네모

동그라미

 

모양이 있다, 말에도

 

따갑다

부드럽다

 

촉감이 있다, 말에도

 

난 안다

 

내가 말했을 때

친구 표정을 봐

따가웠나 봐, 친구가

 

굴리고 굴렸는데도

잘 안 굴러가더니

 

뾰족뾰족

아픈 것 같아, 친구가

 

동글동글 많이 많이

굴려야겠다

 

내 말이 언제나

동글동글

데굴데굴 잘 굴러가게

 

그 동그라미가

공이 되고

눈이 되고

 

그렇게 친구에게 굴러가면

친구는 웃을 테니까

-이현진 동시 <말을 굴려서, 동그랗게 굴려서> 전문

날씨가 지나치게 덥다고 프엉은 생각했다. 이 정도면 베트남의 여름보다 더운 것 같았다. 직원들의 효율적인 동선을 고려해 작업장 안에 설치한 기계들은 바람의 움직임을 가로막았고 해가 높이 올라갈수록 작업장 안 열기는 빠져나가지 못한 채 안쪽부터 차곡차곡 쌓여나갔다. 요란한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대형 팬과 고가의 기계를 중심으로 설치된 에어컨은 작업장 내부 열기를 내리는 데에 역부족이었다. 프엉은 조립팀에서 일했다.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도착한 물품을 전동 드라이버로 조이는 일이었다. 단순한 작업이었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처음 한두시간 쯤이야 그럭저럭 할만했지만, 같은 자세로 열 시간 동안 서서 일하다 보면 발바닥에 뜨끈한 열감이 느껴지고 다리가 저려왔다. 중간에 쉬는 시간이 주어지면 프엉은 바닥에 주저앉아 신발을 벗고 발바닥과 종아리를 주물렀다. 그래도 탄이 일하는 가공팀보다는 상황이 좋은 편이었다. 쇳덩어리를 녹여 모양을 만들고 다듬는 일련의 과정에서 기계에 먹히지 않으려면 가공팀 직원들은 항상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일해야 했다. 아찔했던 순간은 몇 번 있었다지만 지금까지 탄은 다행히도 별문제 없이 일하고 있다. 문제가 생긴 건 탄의 옆 라인에서 일하던 훈이었다. 장갑 끄트머리가 기계에 집히면서 순식간에 왼손이 기계 안으로 말려들어 갔다고 했다. 같이 일하던 파트너가 재빨리 버튼을 눌러 기계를 멈췄지만 이미 훈의 손가락 일부를 기계가 먹어버린 후였다.

그나마 훈은 산재 처리가 되어 치료비 걱정은 없을 거래.”

그건 다행이네. 우리도 다치면 치료비 받나?”

 

탄은 한국인인 훈과 달리 미등록 체류자는 산재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으니 일할 때 절대 다치면 안된다고 했다. 다치고 싶어 다치는 사람이 있을까. 프엉은 탄이 가공팀에서 일하는 게 무서웠다. 치료비를 지원받지 못한다면 한국에서 모은 돈을 병원비로 모두 써버리게 될지도 몰랐다. 다치지 않는, 그런 안전한 일자리는 없을까. 프엉은 탄이 가공팀에서 나가게 되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엉뚱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오승경 소설 <찌개를 끓이다> 중에서

<출판사 서평>


동서문학 제22은 삶의 가장 낮고 깊은 자리에서 길어 올린 언어들이 모여 피워낸 스물두 번째 문학의 꽃이다. 시와 수필, 동시, 동화,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은 일상의 풍경과 가족의 기억, 상실과 치유, 사회적 성찰과 존재의 물음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표제작 말을 굴려서, 동그랗게 굴려서처럼 이 책의 문장들은 모난 삶을 둥글게 어루만지며 독자에게 따뜻한 위로와 공감을 건넨다. 각기 다른 삶의 결을 지닌 필자들은 자신의 경험과 사유를 진솔한 언어로 빚어내며, 문학이 사람과 사람을 잇는 가장 아름다운 다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깊은 성찰과 문학의 향기를 선물할 것이다.

작성 2026.06.10 11:25 수정 2026.06.10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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