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2026년 가을.
아침 7시 40분, 지하철 2호선이 신촌을 지나고 있다. 창밖은 아직 어두컴컴한데, 이어폰 속에서 Carpenters의 노래가 흐른다. “Such a feelin’s comin’ over me…” 그녀의 미소가 담긴 콘트랄토가, 지하철의 덜컹거림과 섞여 이상하게 포근하다.
서른한 살의 적지않은 나이의, 작은 출판사에서 에디터로 일하는 그녀. 요즘은 책 한 권 내는 데도 전쟁 같아서, 퇴근 후엔 대개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를 보거나,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을 본다. 연애? 작년 겨울에 끝난 뒤로, 마음의 문은 살짝 잠가놓은 상태였다. “굳이 열 필요 없지” 하면서.
그날 아침은 달랐다.
어제 밤,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갔었다. 별 기대 없이 갔는데, 거기 있었다. 그는 대학 시절 동아리에서 같이 포스터 붙이고, 밤새 카페에서 시험 공부하던 그. 이제는 건축사무소에서 일하고, 머리도 살짝 벗겨지기 시작했지만, 웃을 때 여전히 눈이 호랑이의 빛을 내며 ‘율 브린너 별명을 가진 그 사람.
둘이 마주치자마자 그가 말했다.
“윤희야, 너 아직도 그때 그 노래 들으며 울었어?”
윤희는 웃으며 대꾸했다. “너야말로, Top of the World 틀어놓고 ‘이별 노래 아니냐’며 울먹이던 애가 이제 기자라니.”
둘 다 웃었다. 어색함이 금세 녹아내렸다.
다음 날 아침, 윤희는 출근길에 그 노래를 다시 꺼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어제의 웃음소리가 아직 귓가에 맴돌아서.
지하철이 한강을 건널 때쯤, “There is wonder in most everything I see”라는 구절이 나오자 윤희는 문득 창밖을 봤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치는 회색 강물과 다리들인데, 오늘은 이상하게 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햇살이 물 위에 흩어져 반짝이는 게, 마치 누가 금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았다.
퇴근 후, 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저녁에 시간 돼? 그냥… 산책이나 할까.”
윤희는 망설이지 않았다. “좋아. 한강에서 만나자.”
저녁 7시, 여의도 공원 근처.
바람이 선선했다. 그는 편의점에서 사 온 따뜻한 캔커피 두 개를 들고 와서 하나를 건넸다. 둘이 나란히 벤치에 앉아 한강을 바라봤다. 배 위로 불빛이 흐르고,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말없이 음악을 틀었다. 당연하게도 Top of the World.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때는 몰랐지. 네가 옆에 있는 게 이렇게 큰 일인지.”
윤희는 대답 대신 캔을 쥔 손을 살짝 움직여 그의 손등에 닿게 했다. 아주 가벼운 접촉. 그런데 그 순간, 세상이 살짝 기울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기울어지는 게 아니라, 들어 올려지는 기분.
바람이 불었다.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강물 위의 불빛이 더 선명해졌다. 새들이—무리지어—저 멀리 날아오르며 꾸욱꾸욱 구성지게 울어댄다.
윤희는 눈을 감았다.
갑자기 모든 게 새로웠다. 출근길의 지하철 냄새, 책상 위 쌓인 원고 더미, 퇴근 후의 피곤함, 심지어 어제의 실수까지. 그 모든 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르게 빛났다. 완벽하지 않아도, 어설퍼도, 그냥 지금 여기 있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가 작게 속삭였다.
“이 느낌… 오랜만이야.”
윤희도 속삭였다.
“나도.”
노래가 끝났다. 그런데도 여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었다. 한강 다리를 건너며, 윤희는 문득 생각했다. 세상 꼭대기에 올라선다는 건, 높은 빌딩 꼭대기에 서는 게 아니구나. 그냥, 누군가와 함께 걸을 때, 그 사람이 주는 작은 온기가 가슴을 채우는 순간. 그때 우리는 이미 충분히 높이 올라와 있는 거야.
멀리서 또 다른 무리의 새떼들이 군무를 추듯 날아올랐다.
하늘이 어두워지며 별이 하나둘 켜졌다. 바람은 여전히 불고, 강물은 계속 흘렀다.
그리고 Karen의 목소리는, 이제 머릿속에서만 아주 작게 반복되었다.
파이튼,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순간들은, 한 번 오면 영원히 우리 안에 남아서, 힘들 때마다 조용히 다시 재생되기 때문이야.
우리는 모두, 언젠가 다시 그 ‘top’에 올라설 테니까.
아니, 어쩌면 이미 올라와 있는지도 모르지.
지금 이 순간, 네가 숨 쉬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