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관 첫날 미술관 앞 바닥에 누운 시위대
서울 영등포구 63빌딩 별관에 '퐁피두센터 분관'이 새롭게 개관한 4일, 해당 미술관 앞에서는 팔레스타인문화연대 등 11개 시민단체가 연합하여 주최한 기자회견과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참가자들은 방위 사업을 주력으로 영위하는 한화그룹이 이스라엘 주요 군수기업과 방산 거래 계약을 맺으며, 결과적으로 해당 지역의 민간인 대량 학살 과정에 공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기업 측이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는 문화예술 후원을 내세워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윤리적 비판을 피하려는 '아트워싱'을 본격적으로 시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장에서는 개관 전 전시 미리보기가 공개된 직후 기자회견이 이어졌으며, 참가자들은 미술관 입구 앞 바닥에 일제히 누워 무력 공격으로 희생된 무고한 민간인들을 기리는 상징적인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번 시위는 단순히 새로운 전시 공간이 개관하는 것에 대한 단편적인 반발을 넘어, 거대 자본의 예술 후원이 지니는 도덕성과 윤리적 책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시각적으로 가시화된 현장이다.
이는 2023년 10월 이후 한국 문화계 내부에서 국제적 인권 문제에 대한 비판적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윤리 의식이 고조된 시대적 맥락과 닿아 있다.

퐁피두센터 분관 앞에서 770명 예술가의 반대 서명 벽보를 읽은 한 가족이 윤리적 보이콧과 예술 감상이라는 두 가지 갈림길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군수기업 거래 전면 해제 요구와 보이콧 선언
이날 현장에 모인 시민단체들은 한화시스템과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엘빗시스템즈, 엘타시스템즈, 이스라엘항공우주산업(IAI) 등 군수기업과 맺은 모든 거래 관계를 즉시 단절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공개된 방위산업 분야 계약 문서에 따르면, 한국항공우주산업(KAI)과 한화시스템은 2024년 10월 3일 열린 국제방위산업전시회(KADEX 2024)에서 엘빗시스템즈와 특수작전용 헬기(UH/HH-60) 성능개량을 위한 3자 업무협약(MOU)을 공식적으로 체결한 바 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해당 미술관에서 진행되는 전시에 대한 전면적인 소비 및 참여 거부를 선언했다. 이들은 무기 기업과의 방산 계약 철회, 개관 전시 기획 철회, 나아가 자원 약탈과 환경 파괴, 민간인 희생을 은폐하는 문화예술 산업 후원 중단을 3대 요구 조건으로 내걸었으며, 해당 요구가 수용될 때까지 보이콧 캠페인을 지속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관람객들이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단순한 행위를 넘어, 그 이면에 존재하는 산업적 연결 고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겠다는 선언적 의미를 지닌다.
한화문화재단의 공공적 가치 강조와 반박 입장
시민단체들의 전면적인 비판과 규탄에 대해 한화문화재단 측은 사업 기획의 독립성과 공공적 가치를 내세우며 반박에 나섰다.
재단 관계자는 본 전시 사업이 단순한 기업 홍보나 부정적 여론 상쇄 차원이 아니라, 문화예술이 지니는 본연의 공공적 가치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바탕으로 추진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재단의 각종 전시와 문화 프로그램은 고유한 비전과 목적에 따라 본사의 개입 없이 철저히 독립적으로 기획 및 운영되고 있음을 강조했다.
이번 분관 유치 및 개관전 역시 국제적인 문화교류를 촉진하고 국내 현대미술의 저변을 폭넓게 확대하려는 공익적 취지 아래 흔들림 없이 추진되는 사업이라고 설명했다.
재단 측의 이 같은 해명은 방산 부문의 경영적 판단과 재단의 문화예술 후원 영역이 철저히 분리된 별개의 독립적 사안이라는 입장을 명확히 한 것이다.
역사적 아트워싱 사례와 확산되는 국제적 연대
사태의 핵심 쟁점인 '아트워싱'이란 거대 자본이나 기업이 문화예술 후원을 통해 자신들에게 제기되는 윤리적 비판을 세탁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2017년 루브르 박물관 아부다비 분관이 정부의 인권 침해 논란을 예술로 은폐하려 했다는 지적이나, 미국 갤릭 시거 재단이 담배 산업의 건강권 침해 문제를 예술 후원으로 무마하려 했던 역사적 사례들과 본질적으로 맞닿아 있다.
이번 논쟁은 개관일 당일에만 일어난 순간적인 항의가 아니다. 예술인 연대는 5월 15일 공동성명 발표 이후 21일간 국내외 연명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왔으며, 개관일 오전까지 770명 이상의 문화예술계 종사자가 반대 서명에 참여했다.
2026년 제61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예술감독인 최빛나를 비롯해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수상 이력이 있는 임흥순, 노순택, 정은영 등 주요 작가들이 대거 동참했다. 논란은 해외로도 확산되어 프랑스 유력 일간지 리베라시옹이 비중 있게 보도했다.
이어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 비평가 아리엘라 아이샤 아줄레이, 제59회 베니스비엔날레 은사자상 수상자 알리 체리는 프랑스 퐁피두센터 본원이 한국 재단과의 관계를 전면 중단해야 한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이처럼 다수의 국내외 종사자가 조직적인 연명 활동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면서, 예술계 내부의 윤리적 논쟁이 공개적인 대립으로 완전히 전환된 양상이다.
인간 중심 가치와 소비자의 윤리적 판단 기준
거대 기업의 예술 후원이 그 이면에 존재하는 비윤리적 행위를 흐리는 완충 장치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이제 전시장을 찾는 관람객의 주체적인 판단 영역으로 넘어왔다.
고도화된 기술과 막대한 자본은 궁극적으로 인류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도구일 뿐이며, 우리를 둘러싼 제반 시스템은 인간의 생명과 보편적 권리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철학이 문화 소비의 중요한 척도가 되고 있다.
이는 예술이 거대 자본의 흐름 속에서도 고유의 윤리적 가치를 중심에 두고 지켜내야 함을 시사한다. 논란의 중심에 선 개관전 '큐비스트: 시각의 혁신가들'은 10월 4일까지 진행된다.
화요일과 목, 금,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8시까지 운영하며 입장료는 1만 5천 원이다. 만약 이번 사태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면, 동급의 훌륭한 현대 미술 전시를 관람할 수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토탈미술관, 리움미술관 등 대안이 될 수 있는 훌륭한 공간도 충분히 존재한다.
기업과의 거래 관계가 끊어질 때까지 지속하겠다는 시민단체의 강력한 보이콧 선언 속에서, 제공된 실용적 정보와 확립된 윤리적 관점을 바탕으로 단순히 전시를 구경하는 관람자를 넘어 윤리적 선택을 실행하는 주체적 행위자로서 전시장을 방문할지 결정하는 것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전문 용어 사전]
▪️아트워싱: 기업이나 거대 자본이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막대한 후원을 통해 자신들에게 제기되는 윤리적 비판이나 부정적인 이미지를 교묘하게 세탁하는 현상이다.
▪️KADEX: 대한민국 국제방위산업전시회의 약칭으로, 전 세계 주요 방위산업체들이 한자리에 모여 무기 체계와 국방 기술을 선보이고 직접 교류하며 거래하는 대규모 글로벌 방산 행사다.
▪️MOU: 업무협약의 약자로, 정식 본계약 체결에 앞서 양측의 이해관계와 향후 사업 진행에 대한 상호 간의 협력 의지를 공식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작성하는 예비 문서다.
▪️베니스비엔날레: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2년마다 열리는 세계적인 권위의 국제 현대미술 전시회로, 국가별로 독립된 전시관을 운영하여 미술계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주요 행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