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벽돌에 남은 정동의 근대화, 정동제일교회

정동제일교회, 선교와 교육·사회 변화를 품은 근대문화의 현장

정동길 근대문화유산을 대표하는 서양식 교회 건축

아펜젤러의 예배 공동체에서 항일운동의 거점으로

서울 정동길을 걷다 보면 붉은 벽돌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가운데 정동제일교회는 개항 이후 정동이 선교와 교육, 의료, 외교가 모인 근대문화의 중심지로 변화한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 공간이다.

서울 중구 정동은 흔히 ‘근대문화유산 1번지’로 불린다. 덕수궁을 따라 이어지는 길에는 공사관, 학교, 교회, 병원, 언론기관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해설 자료도 정동을 정치와 외교의 무대이자 신문물의 발신지, 선교와 교육·의료의 기지로 설명한다.

 

정동제일교회는 그 흐름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건축물 가운데 하나다. 이 교회는 감리교 선교사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가 세운 예배 공동체에서 출발했다. 자료에 따르면 아펜젤러 부부는 1885년 조선에 들어왔고, 같은 해 10월 정동의 사택에서 한국인 감리교 신자들과 함께 성찬예배를 드렸다. 정동제일교회는 이 예배를 교회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서울 정동교회_헨리 아펜젤러 목사상 (촬영년도 : 2015년)
서울 정동교회_헨리 아펜젤러 목사상 (촬영년도 : 2015년)  (사진= 국가유산청)

정동제일교회가 오늘날 정동의 붉은 벽돌 풍경을 상징하는 이유는 건축 양식에도 있다. 자료는 1897년 이 자리에 감리교 예배당 가운데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 들어섰고, 벧엘예배당이 우리나라 최초의 고딕 양식 예배당으로 완공됐다고 설명한다. 붉은 벽돌과 아치형 창, 서양식 예배당 구조는 한옥 중심의 서울 도심에 새롭게 들어온 근대 건축의 언어였다.

 

정동제일교회의 의미는 건축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곳은 서양 종교가 들어온 장소인 동시에 근대적 생활 문화와 사회 변화가 확산된 공간이었다. 초창기 예배당에는 남녀를 구분하는 휘장이 있었으나, 1915년 손정도 목사가 이를 없애면서 남녀가 함께 예배하는 변화가 이뤄졌다. 이는 종교 공간 안에서 근대적 평등 의식이 드러난 사례로 볼 수 있다.

 

서양 음악과 문화도 정동제일교회를 통해 들어왔다. 자료에는 재미동포들의 성금으로 1918년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교회는 예배 공간을 넘어 서양 음악과 공연 문화가 소개되는 창구 역할도 했다.

 

정동제일교회는 여성 교육과 독립운동의 역사와도 연결된다. 우리나라 최초로 미국 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취득한 하란사도 이 교회 교인이었고,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인 이필주 목사와 이화여고생 유관순도 정동교회와 관련된 인물로 소개된다. 자료는 정동교회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고 설명한다.

 

정동제일교회가 자리한 정동은 개항 이후 미국 공사관을 비롯한 각국 공사관이 들어서고, 선교사들이 학교와 병원, 교회를 세우며 변화한 공간이다. 자료에는 정동이 외교, 종교, 통상 경제의 중심지로 변해 구미 열강이 추구한 근대화의 전진기지가 됐다는 설명도 남아 있다.

 

따라서 정동제일교회의 빨간 벽돌은 단순한 건축 재료가 아니다. 그것은 개항기 서울이 외부 세계와 만나며 겪은 변화, 서양식 교육과 종교의 확산, 여성과 청년의 사회 참여, 독립운동의 기억을 함께 담은 표면이다.

 

오늘날 정동길을 걷는 일은 아름다운 돌담길을 감상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붉은 벽돌 예배당 앞에 서면 정동이 왜 근대문화의 출발점으로 불리는지, 그리고 정동제일교회가 왜 그 중심에 놓이는지 확인할 수 있다.

작성 2026.06.04 16:53 수정 2026.06.04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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