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6월 3일, "조선 혁명이 성공할 때까지 끝까지 싸워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41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일장기를 변소에 처박다"… 소년 윤세주의 남다른 반골 기질

 

 

 

 

[독립운동사 기획] 올해로 순국 84주년을 맞이한 석정(石正) 윤세주 열사(1900~1942)는 일제강점기 무장 독립투쟁의 핵심이자, 불굴의 혁명 이론가였습니다 . 

영화 '암살'의 흥행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약산 김원봉의 고향 후배이자 평생의 동지였던 그는, 조국 해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영남 출신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입니다. 소년 시절의 반골 기질부터 중국 타이항산(태항산) 최전선에서 맞이한 최후까지, 그의 뜨거웠던 삶을 심층 조명합니다.

 


1. "일장기를 변소에 처박다"… 소년 윤세주의 남다른 반골 기질

 

1900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난 윤세주는 이웃에 살던 김원봉과 어린 시절부터 형제처럼 자랐습니다 . 두 소년은 밀양 강변을 거닐며 조국의 현실을 한탄하고 독립을 결의하곤 했습니다.

그의 항일 의식은 밀양공립보통학교 재학 시절부터 폭발했습니다. 한일병합에 분노한 윤세주는 일본어 수업을 전면 거부했습니다. 특히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날, 학교에서 나누어 준 일장기를 변소에 처박아 버리는 대담함을 보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일제 교장에게 참혹한 고문을 당한 소년 윤세주는 끝내 학교를 자퇴하며 타협 없는 투쟁의 길을 택했습니다.

 

2. 영남을 깨운 함성, '밀양 3·13 만세운동'의 주역

 

1919년 서울에서 3·1 운동을 직접 목격한 윤세주는 대규모 만세 시위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그는 독립선언서를 외투 안감 속에 숨겨 삼엄한 경계를 뚫고 고향 밀양으로 내려왔습니다.

동지들을 은밀히 모아 거사를 준비한 그는 3월 13일, 수많은 군중이 모인 밀양 장날을 디데이로 잡았습니다. 윤세주는 천여 명의 군중 앞으로 뛰어올라 격정적인 어조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그의 사자후에 감화된 군중들이 일제히 만세를 외치며 밀양 전역이 뒤흔들렸고, 이는 영남 지역 전체로 만세 운동이 확산되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이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 선풍을 피해 만주 길림으로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3. 의열단 창단과 7년의 지옥 같은 옥고

 

만주에 도착한 윤세주는 1919년 11월, 김원봉을 비롯한 신흥무관학교 출신 청년들과 함께 항일 비밀결사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을 창단했습니다 .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는 기치 아래, 그는 의열단의 브레인이자 핵심 행동대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920년,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회사 등 식민 통치 중추 기관을 동시다발적으로 폭파하기 위해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는 '제1차 중대 거사'를 도모했습니다 . 그러나 안타깝게도 밀고자에 의해 거사 직전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일제의 모진 고문 속에서도 동지들의 비밀을 끝까지 지켜낸 그는 대구형무소에서 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지옥 같은 옥고를 치렀습니다 .

 

4. 무장 투쟁의 지도자, 조선의용대를 출범시키다

 

1927년 출옥 후 일제의 감시가 이어지자, 윤세주는 다시 중국 난징으로 탈출했습니다 . 감옥에서의 고초는 그를 더 단단한 혁명가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김원봉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교관을 맡아 후학 청년들에게 군사학과 혁명 이론을 가르쳤습니다 .

1930년대 중반에는 분열되어 있던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묶기 위해 '조선민족혁명당' 창설을 주도하며 탁월한 정당 정치인의 면모도 보여주었습니다 . 이어 1938년 10월, 한중 연합 군사 조직인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정치조 부조장 겸 국어(중국어) 편집발행인으로 활동하며 부대의 정신적 지주이자 대변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

 

5. 타이항산(태항산)의 별이 되다… 최전선에서의 고결한 최후

 

1940년대 들자 윤세주는 일본군과의 더 치열한 무장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조선의용대 주력 부대를 이끌고 화북 지방의 험준한 타이항산(태항산) 지역으로 진출했습니다 . 그곳에서 아군과 중국 팔로군과의 연합 작전을 펼치며 적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1942년 5월, 일제는 전면적인 소탕전을 개시하며 수십만 명의 대군으로 타이항산을 겹겹이 포위해 들어왔습니다. 후퇴하는 아군과 중국 팔로군 지도부의 탈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윤세주는 결사대를 조직해 직접 총을 들고 최전선에서 맞서 싸웠습니다.

전투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적의 총탄이 그의 복부를 관통했습니다. 중상을 입고도 대원들을 독려하던 그는, 사흘간의 눈물겨운 사투 끝에 1942년 6월 3일, "조선 혁명이 성공할 때까지 끝까지 싸워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41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위대한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현재 고향 밀양에는 그의 뜻을 이어받은 의열기념관이 건립되어 후대에 그 정신을 전하고 있습니다 . 조국의 해방을 단 3년 앞두고 이국의 거친 산야에서 스러져간 윤세주 열사. 그의 이름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가장 뜨거운 불꽃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작성 2026.06.03 17:07 수정 2026.06.03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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