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퉁탕 최영미의 하루짓기]시금치를 떠나보내다.

5월 아침.(사진;최영미)

현관문을 열자 아카시아향이 훅 끼칩니다. 산자락 가까이로 몇 걸음 옮기니 파도치듯이 향이 밀려드는데요

이렇게 촘촘한 향은 어린 시절  한순간으로 저를 데려다 놓습니다. 3 때인데요.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돌아오는 늦은 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촉촉해진 밤공기에 실린 진한 아카시아향이 확 끼쳐오면 무거운 가방으로 한쪽 어깨가 내려앉은 수험생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요. 향기를 머금고 집으로 걸어가는 10분은 내일 또 도시락 두 개를 싸들고 새벽에 집을 나설 수 있는 힘이 됐으니 아카시아향은 제게 릴리프 선수였던듯한데요.   

   

 그 당시 배차간격이 25분이던 22-1번 버스가 학교 앞 정류장을 그냥 지나칠까 봐 버스가 오는 방향으로 몸을 비스듬히 누이고 고개를 쭉 빼고 기다렸는데요. 한눈팔다 오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지 않으면 낭패입니다. 다음 차가 1시간 이상 늦는 경우가 다반사니 버스에 오르기 전에는 안심할 수 없는 노릇이죠. 집에 가는 길이 녹녹지 않았으니 버스에서 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쉴법한데 꼭 그래서만은 아닙니다.

    

 우리 집 형편에 대학에 합격한들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을까 의문이고 그렇다고 장학생으로 들어갈 만큼 성적이 좋은 것도 아닌 가난하고 번민이 많은 수험생이 학교생활에 열심일 리도 없을 터.

목표는 없지만 그래도 대학은 가고 싶다고 막연히 기대하던 시절, 선이 흐릿한 시간이었습니다.      

 

작은 먼지에도 주저앉을 것 같던 고3 수험생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아카시아향이었을 겁니다. 복잡하고 미묘한 어린 학생의 고민과 게으름을 괜찮다 괜찮아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공기가 있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지요.  

   

그 후로 아카시아향이 진동할 때면 버스정류장에 내리면서 맡았던 그 향이 떠오르며 힘든 시기를 잘 견뎠다 토닥이게 되고, 상황을 한발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찾습니다.      

 

요 며칠 한낮에 30도를 오르내리지만 그래도 5월엔 마당에 앉아있기 좋아서 언니, 오빠네 식구들이 모였습니다. 잡담을 하며 세집이 나눌 요량으로 늦가을에 파종한 시금치를 모두 뽑아 올케, 언니, 엄마와 함께 다듬었습니다

말 그대로 손바닥만 한 땅에 심은 건데 의외로 양이 많아 세집이 넉넉하게 나눌 수 있겠다 싶었는데요.   

  

나누자는 말을 하기도 전에 언니가 다듬은 시금치를 이등분해서 나눠 담더니 하나씩 가져가자고 올케언니에게 건넵니다. 이거 데치면 얼마 안 된다면서 좀 더 가져가라고 한 줌 꺼내 올케 그릇에 담고, 올케도 언니와 똑같이 크게 한 움큼 쥐더니 가져가랍니다. 서로 한 줌이 오갈 때마다 더 가져가라. 아니다. 고맙다를 몇 번,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떨어진 시금치를 몇 개 남기고 그렇게 시금치는 제 눈앞에서 떠났습니다.

 

제가 기른 작물인데 서로에게 고맙다말인심을 한참 쓰더니 결국은 반씩 가져갑니다. 이게 뭐지 싶었지만 아카시아향을 맡으며 새로운 마음이 생깁니다. 그들에게 시금치에 더해 서로 인심 쓰는 마음까지 실어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뿌듯해지는데요. 어차피 저는 기르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만끽했으니까요.

 시금치 뽑은 자리에 또 심어야겠어요. 퇴비를 뿌려놓고 쌀뜨물이 생기는 대로 부지런히 가져다 날라야겠습니다

 

  K People Focus 최영미 칼럼니스트 (ueber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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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6.05.17 15:19 수정 2026.05.17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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