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琉球) 역사에서 고구마는 흔히 기근을 막은 구황 작물로 기억된다. 그러나 야에야마(八重山) 제도에서 고구마의 의미는 단순한 구원의 작물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생명을 살린 희망이었지만, 동시에 가혹한 인두세(人頭税) 제도와 결합하면서 부모가 자식을 죽여야 하는 참혹한 역설을 드러낸 작물이기도 했다.

고구마는 미야코섬에는 1597년, 오키나와 본섬에는 1605년에 전래되었다. 그러나 류큐 열도의 최남단인 야에야마 제도에는 이보다 훨씬 늦은 1694년에야 들어왔다.
이때 고구마를 야에야마에 전한 인물이 하테루마 타카야스(波照間高康)였다. 척박한 산호초 토양과 잦은 태풍,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야에야마 사람들에게 고구마는 분명 귀중한 작물이었다. 잘 자라고, 비교적 재해에 강하며, 굶주림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에야마의 현실은 고구마 하나로 해결될 만큼 단순하지 않았다. 고구마 보급으로 식량 상황이 나아지자 인구가 늘어났다. 보통이라면 인구 증가는 축복이지만, 야에야마에서는 곧 세금 증가를 뜻했다.
사키시마(先島) 지역을 짓누르던 인두세는 토지나 수확량이 아니라 사람의 머리수에 부과되는 세금이었다. 아이가 살아남아 인구가 늘수록 가족이 감당해야 할 세금도 늘어났다.
바로 여기서 고구마의 비극적 역설이 발생했다. 굶어 죽을 아이를 살린 작물이, 살아남은 아이를 다시 세금의 대상으로 만든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인두세 부담에 짓눌린 부모들은 갓난아이를 죽이는 영아 살해(嬰児殺し)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렸다. 이는 단순한 풍습이 아니라, 세금 제도가 생명 자체를 부담으로 바꾸어버린 잔혹한 구조의 결과였다.
더욱 비참한 것은 야에야마 민중이 생산한 쌀조차 먹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쌀은 현지 지두(地頭)와 슈리(首里) 왕부에 의해 거두어졌고, 일반 하층민에게 남은 것은 고구마, 고구마 잎, 해조류뿐이었다. 즉 고구마는 식탁을 풍요롭게 만든 작물이 아니라, 쌀을 빼앗긴 사람들이 겨우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 의지한 마지막 식량이었다.
결국 하테루마 타카야스의 고구마 전래는 분명 위대한 공적이었다. 그러나 그 공적은 야에야마의 가혹한 지배 구조 속에서 완전한 축복이 되지 못했다. 생명을 살린 작물이 인두세와 만나자, 생명은 다시 세금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이 야에야마 고구마 역사에 드리운 가장 어두운 그늘이었다.
1694년 하테루마 타카야스가 야에야마(八重山)에 전한 고구마는 굶주림을 막은 귀중한 구황 작물이었다. 그러나 인두세(人頭税)라는 잔혹한 제도 아래에서, 고구마가 살린 생명은 곧 세금 부담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부모가 갓난아이를 죽여야 하는 영아 살해(嬰児殺し)의 비극까지 이어졌다. 야에야마의 고구마는 생명의 작물이자, 동시에 류큐 왕국 신분제와 조세 수탈의 잔혹함을 드러내는 역사적 증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