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공정책신문=김유리 기자]
(편집자주) 한국공공정책신문은 박동명 법학박사의 3회 연재 칼럼을 통해 AI 시대 박사학위의 의미와 한국사회 고급인재 활용 문제를 진단한다. 이번 연재는 ① 박사학위 2만 명 시대의 현실, ② AI 시대 지식과 질문의 관계, ③ 시장과 사회가 알아듣는 전문성의 번역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박사학위의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전환하기 위한 방향을 모색한다. 박동명은 노동법을 전공한 법학박사로서 지방의회 의정활동, 공공정책 평가, 인공지능 활용 의정교육 분야에서 활동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박사학위의 미래를 공공정책과 사회적 활용의 관점에서 조명한다.
지난 칼럼에서 한국 사회가 사실상 ‘박사학위 2만 명 시대’에 들어섰다는 현실을 살펴보았다. 박사학위 취득자는 늘어나고 있지만, 학위가 곧바로 안정된 지위와 사회적 권위로 연결되던 시대는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이제 박사학위의 문제는 단순히 취업이나 소득의 문제가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박사학위가 지닌 전문성의 의미가 바뀌고 있다는 데 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인공지능이 있다.
인공지능은 지식의 생산과 유통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과거에는 전문 지식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경쟁력이었다. 논문을 검색하고, 선행연구를 검토하며, 복잡한 이론을 이해하고, 자료를 분석하는 일은 오랜 시간 훈련받은 연구자에게 주어진 전문 영역이었다. 박사학위자는 바로 그 지식 접근 능력과 해석 능력을 통해 사회적 권위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생성형 AI는 논문을 요약하고, 개념을 설명하며, 연구 동향을 정리하고, 보고서 초안을 작성한다. 방대한 자료를 빠르게 비교하고, 여러 이론의 차이를 설명하며, 정책 대안의 장단점까지 정리한다. 물론 AI의 답변이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니며, 검증과 판단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식에 접근하고 정보를 정리하는 비용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아졌다는 사실이다.
이 변화는 박사학위자에게 불편하지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지식 접근 자체가 더 이상 희소한 능력이 아니라면, 박사는 무엇으로 자신의 전문성을 증명할 것인가. 많이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시대에, 박사의 가치는 어디에서 나와야 하는가.
지식을 움직이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
AI는 주어진 질문에 대해 빠르게 답한다. 그러나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 어떤 문제가 진짜 문제인지, 사회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모순이 어디에 있는지를 판단하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영역이다. 특히 박사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단순한 답변 능력이 아니다. 박사는 보이지 않는 문제를 드러내고, 흩어진 지식을 연결하며, 기존 질서가 묻지 않았던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박사는 지식을 소유한 자가 아니라, 지식을 움직이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어야 한다.
지식은 쌓아두는 순간 정지한다. 그러나 질문은 지식을 움직이게 한다. 질문이 없으면 지식은 책장 속에 머문다. 반대로 좋은 질문은 지식을 정책으로 만들고, 전략으로 만들고, 제도로 만들고, 사회적 변화의 동력으로 만든다. 지식은 머릿속에 있을 때 소유물이지만, 질문이 될 때 비로소 현실을 움직이는 힘이 된다.
과거의 박사는 지식을 깊이 축적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AI 시대의 박사는 그 지식을 어떤 질문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단순히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아는 것은 어떤 문제를 새롭게 설명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나는 어떤 이론을 전공했는가”가 아니라 “그 이론은 오늘의 사회문제를 어떻게 다시 보게 하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좋은 질문은 현실을 다시 구조화하는 능력이다. 같은 현실을 보더라도 어떤 사람은 현상만 보고, 어떤 사람은 문제를 본다. 어떤 사람은 문제를 보더라도 기존 방식의 해결책만 찾지만, 어떤 사람은 문제의 정의 자체를 바꾼다. 바로 그 지점에서 전문성의 차이가 발생한다.
기업의 경우를 보자. 기존에는 “이 제품의 매출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가 중요한 질문이었다. 물론 이 질문도 필요하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 제품은 여전히 필요한가”이다. 더 나아가 “고객이 겪는 문제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이 질문의 차이가 기업의 전략을 바꾸고, 새로운 시장을 만들며, 때로는 산업의 질서를 바꾼다.
공공정책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산을 얼마나 더 투입할 것인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 정책은 실제로 시민의 삶을 바꾸고 있는가”이다. “민원이 왜 증가하는가”를 묻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 깊은 질문은 “행정 시스템 자체가 시민의 불편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이다. “지역소멸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라는 질문도 중요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인구 감소 시대에 지역의 지속가능성을 어떻게 새롭게 설계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저출생 문제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출산율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라고 묻는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제는 “청년들은 왜 결혼과 출산을 삶의 선택지에서 제외하고 있는가”, “주거·일자리·교육·돌봄 구조는 어떤 방식으로 가족 형성을 어렵게 만드는가”, “국가는 개인의 삶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재설계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질문이 바뀌어야 정책이 바뀐다.
지방의회와 지방행정의 영역에서도 질문의 수준이 의정활동의 수준을 결정한다. “예산이 적절하게 집행되었는가”를 묻는 것은 행정사무감사의 기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그 예산은 주민의 삶에 어떤 변화를 만들었는가”이다. “사업이 계획대로 추진되었는가”보다 “그 사업은 여전히 필요한 사업인가”를 물어야 한다. 형식적 감시를 넘어 정책의 본질을 묻는 질문이 지방의회의 역량을 높인다.
질문의 방향을 재설계하는 사람
AI 시대에는 이러한 질문 설계 능력이 더욱 중요해진다. AI는 자료를 정리할 수 있다. AI는 통계를 분석할 수 있다. AI는 문장을 다듬고, 대안을 비교하고, 보고서의 구조를 제안할 수 있다. 그러나 AI에게 어떤 자료를 물을 것인지, 어떤 가설을 검토할 것인지, 어떤 가치 기준으로 대안을 판단할 것인지는 인간이 정해야 한다. 질문이 빈약하면 AI의 답변도 빈약하다. 질문이 깊으면 AI는 더 깊은 사고를 돕는 도구가 된다.
따라서 AI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AI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AI를 활용하여 더 좋은 질문을 만드는 일이다. AI를 단순한 검색 도구로만 사용하는 사람은 AI의 답변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그러나 AI를 통해 자료를 넓게 탐색하고, 여러 관점을 비교하며, 자신의 문제의식을 더 정교하게 다듬는 사람은 AI를 지적 확장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여기서 박사의 역할이 다시 중요해진다. 박사는 AI가 제시한 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라, 그 답의 전제와 한계를 검토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AI가 정리한 자료를 단순히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료가 무엇을 빠뜨렸는지, 어떤 관점이 배제되었는지, 어떤 질문이 아직 제기되지 않았는지를 찾아내야 한다. AI 시대의 박사는 답을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답의 조건을 검토하고 질문의 방향을 재설계하는 사람이다.
문제를 새롭게 정의하는 능력
결국 박사의 전문성은 ‘정답을 아는 능력’에서 ‘문제를 새롭게 정의하는 능력’으로 이동하고 있다. 정답은 누구나 검색할 수 있다. 자료는 누구나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를 새롭게 정의하는 능력은 쉽게 대체되지 않는다. 사회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다시 묻고, 익숙한 제도의 빈틈을 발견하며, 보이지 않던 관계를 드러내는 능력은 깊은 사유와 현장 경험, 그리고 가치 판단이 결합될 때 가능하다.
이 점에서 박사학위자는 자신의 역할을 다시 성찰해야 한다. 박사는 단순히 논문을 쓴 사람이 아니다. 박사는 하나의 문제를 오래 붙잡고 사유한 사람이다. 하나의 현상을 여러 이론과 자료를 통해 검토하고, 논리와 근거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세워본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 훈련은 학문 내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사회와 시장, 기업과 행정이 직면한 복잡한 문제를 새롭게 질문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지식의 시대가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식은 더 중요해졌다. 다만 지식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이제 지식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하는 것이다. 지식은 외우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것이다. 지식은 권위를 세우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문제를 움직이기 위한 도구이다.
박사학위의 위기는 바로 이 전환을 따라가지 못할 때 발생한다. 과거의 방식대로 지식을 축적하는 데 머물고, 자신의 전공 언어 안에 갇혀 있으며, 현실의 문제를 새롭게 묻지 못한다면 박사학위는 점점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자신의 지식을 질문으로 바꾸고, 그 질문을 통해 사회의 문제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다면 박사학위는 여전히 강력한 의미를 갖는다.
이제 박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지식의 축적만이 아니다. 지식을 움직이는 질문이다. 좋은 질문은 전문성을 살아 있게 만들고, 학문을 현실과 연결하며, AI를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지적 동반자로 전환한다.
AI 시대의 박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내가 가진 지식은 어떤 문제를 새롭게 보게 하는가.
내 연구는 사회의 어떤 고통을 설명할 수 있는가.
내 전공은 기업과 시장, 행정과 공동체의 어떤 문제를 다시 묻게 하는가.
나는 AI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을 반복하고 있는가, 아니면 AI를 활용해 더 깊은 질문을 만들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박사학위의 미래가 갈린다.
지식을 소유한 박사는 대체될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을 움직이는 질문을 던지는 박사는 쉽게 대체되지 않는다. AI가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인간이 묻지 않는 질문에는 답할 수 없다. 결국 미래의 전문성은 답을 많이 갖는 데 있지 않다. 세상이 아직 묻지 못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통해 현실의 방향을 바꾸는 데 있다.
박사학위의 시대가 끝난 것이 아니다. 낡은 지식 소유자의 시대가 끝나고 있을 뿐이다.
이제는 질문하는 박사의 시대이다.
▷법학박사, 선진사회정책연구원 원장
▷한국정책연구원 원장
▷(사)한국공공정책학회 부회장, 상임이사
▷(전)국민대학교 행정대학원 외래교수
▷(전)서울특별시의회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