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공정책신문=김유리 기자]
(편집자주) 한국공공정책신문은 박동명 법학박사의 3회 연재 칼럼을 통해 AI 시대 박사학위의 의미와 한국사회 고급인재 활용 문제를 진단한다. 이번 연재는 ① 박사학위 2만 명 시대의 현실, ② AI 시대 지식과 질문의 관계, ③ 시장과 사회가 알아듣는 전문성의 번역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박사학위의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전환하기 위한 방향을 모색한다. 박동명은 노동법을 전공한 법학박사로서 지방의회 의정활동, 공공정책 평가, 인공지능 활용 의정교육 분야에서 활동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박사학위의 미래를 공공정책과 사회적 활용의 관점에서 조명한다.
세상은 여전히 학위를 존중한다. 특히 박사학위는 오랜 시간 한 분야의 전문성과 지적 성실성, 그리고 학문적 훈련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박사학위는 단순한 졸업장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의 공부와 연구, 고독한 사유와 논증, 그리고 한 분야의 지식체계 안에서 일정한 성취를 이루었다는 사회적 인증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냉정하다. 박사학위가 더 이상 안정된 지위와 사회적 권위를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박사라는 이름만으로도 일정한 존중과 기회가 주어졌지만, 이제는 박사학위자가 무엇을 전공했는가보다 그 전문성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
한국 사회는 사실상 "연간 신규 박사 2만 명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한국교육개발원 국가교육통계센터 자료에 따르면 2025년 전국 대학원 박사학위 취득자는 1만9,831명으로, 관련 통계가 작성된 1999년 이후 가장 많은 규모였다. 이는 2015년보다 51.6% 증가한 수치이며, 1999년의 5,586명과 비교하면 박사학위 취득자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이 숫자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한국 사회의 고등교육 수준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긍정적 신호이다. 학문 연구에 도전하는 사람이 늘고, 전문성을 높이려는 사회적 욕구가 확대되었다는 뜻이다. 여성 박사학위 취득자도 2025년 8,629명으로 처음 8천 명을 넘어섰고, 전체 박사학위 취득자 중 여성 비율도 43.5%로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이는 한국 사회의 지식 생산 구조가 점차 다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불편한 현실이다. 박사학위의 희소성이 약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박사학위자가 많아졌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고급 인재가 많아지는 것은 국가적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문제는 박사급 인재를 사회와 시장, 기업과 공공부문이 충분히 흡수하고 활용할 수 있는 구조가 아직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박사학위 취득 목적도 달라지고 있다.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이 2025년 박사학위 취득자 1만49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박사과정 진학 이유로 ‘전문성 향상’을 꼽은 응답이 37.5%로 가장 많았다. ‘교수·연구원이 되기 위해서’라는 응답은 35.5%였다. 2011년 조사에서는 ‘교수·연구원이 되기 위해서’가 43.2%로 가장 많았지만, 최근에는 자신의 직무 영역에서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박사과정 진학이 더 두드러지고 있다.
이는 중요한 변화이다. 과거 박사학위는 주로 대학 교수나 연구원이 되기 위한 통로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제 박사학위는 학계 진출만을 위한 자격이 아니다. 직장인, 공무원, 전문가, 정책 담당자, 기업인, 지역 활동가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영역에서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박사과정에 진학하고 있다. 박사학위의 의미가 ‘학문 내부의 자격’에서 ‘사회적 전문성의 확장’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노동시장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2025년 박사학위 취득 취업자 또는 취업 예정자 7,005명 가운데 연봉 2,000만 원 미만이라고 답한 비율은 10.4%였다. 2011년 6.3%보다 4.1%포인트 증가한 수치이다. 특히 예술 및 인문학 분야에서는 연봉 2,000만 원 미만 비율이 26.8%로 가장 높았고, 교육 분야 19.0%, 사회과학·언론·정보학 분야 14.9% 순으로 나타났다. ([연합뉴스][1])
이 통계는 한국 사회에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왜 가장 오랜 시간 공부하고 연구한 사람들이 사회에서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는가. 왜 박사학위가 어떤 이들에게는 자부심이 아니라 부담이 되는가. 왜 깊은 전문지식이 노동시장에서 곧바로 가치로 전환되지 못하는가.
물론 모든 박사학위가 경제적 보상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학문은 돈으로만 평가될 수 없다. 인간과 사회, 역사와 가치, 제도와 정의를 탐구하는 일은 시장가격으로 환산할 수 없는 고유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현실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박사학위 취득자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사회라면, 그들의 지식과 역량이 사회적 가치와 공공적 성과로 연결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박사학위의 위기는 학위가 많아졌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박사급 지식의 사회적 활용 방식"에 있다. 많은 박사들이 깊은 지식을 갖고 있지만, 그 지식이 사회의 언어, 시장의 언어, 기업의 언어, 정책의 언어로 전환되지 못할 때 전문성은 고립된다. 논문 속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현실의 문제 해결로 연결되지 못할 때 지식은 힘을 잃는다.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의 2025년 관련 보고서도 박사 인력의 양성과 활용 문제를 국가 고급 인재 정책의 중요한 과제로 보고 있다. 해당 보고서는 박사 인력의 노동시장 이행, 고급 인력 양성, 박사급 인재의 배분과 활용을 주요 주제로 다루고 있으며, 국내 신규 박사학위 취득자의 노동시장 초기 이행 실태 분석을 주요 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 인재정책의 문제이다. 한 사회가 박사급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학위자를 배출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 지식이 산업과 행정, 교육과 문화, 지역과 공동체 안에서 작동하도록 만드는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박사학위자는 늘고 있는데, 그 전문성을 활용할 사회적 통로가 좁다면 그것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의 미성숙이다.
특히 인문사회계 박사들의 현실은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법학, 행정학, 사회학, 교육학, 인문학 분야의 박사들은 종종 시장성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학문 자체가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의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은 대부분 인문사회적 통찰을 필요로 한다. 저출생, 고령화, 지역소멸, 사회갈등, 지방재정 위기, 공공서비스 혁신, 인공지능 윤리, 규제개혁, 사회적 신뢰 회복은 모두 인간과 제도, 조직과 공동체를 이해해야 풀 수 있는 문제들이다.
그럼에도 인문사회계 박사들이 사회에서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지식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지식의 연결 방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학문적 언어가 정책 언어로 번역되지 못하고, 연구 결과가 기업의 전략 언어로 전환되지 못하며, 이론적 통찰이 시민의 삶과 행정 현장의 문제 해결로 이어지지 못할 때 전문성은 좁은 학문 세계 안에 갇히게 된다.
이제 박사학위의 권위는 명함에서 나오지 않는다. 호칭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학위증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박사학위의 권위는 그 사람이 던지는 질문, 그 질문이 드러내는 문제의 깊이, 그리고 그 문제를 사회적으로 해결해 내는 능력에서 나온다.
과거에는 지식을 많이 소유한 사람이 전문가였다. 그러나 지금은 지식을 사회 속에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전문가이다. 전문지식을 현실의 문제와 연결하고, 복잡한 현상을 해석하며, 새로운 대안을 설계할 수 있을 때 박사학위는 다시 힘을 갖는다.
따라서 오늘의 박사학위 위기는 학위의 종말이 아니라 학위 의미의 전환이다. 박사학위가 더 이상 자동적 권위를 보장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을 뿐이다. 이제 박사학위자는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무엇을 전공했는가를 넘어, 내 전공은 사회의 어떤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를 넘어, 내 지식은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유용한가. 나는 어떤 논문을 썼는가를 넘어, 나는 어떤 현실의 문제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는가.
박사학위 2만 명 시대는 '위기'이자 '기회'이다. 위기는 학위의 희소성이 약화되었다는 데 있다. 그러나 기회는 그만큼 한국 사회가 더 많은 고급 지식 인재를 보유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 관건은 이들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박사급 인재를 대학 울타리 안에만 가두지 말고, 공공정책과 지방행정, 기업 전략과 산업 혁신, 지역 문제 해결과 사회갈등 조정의 현장으로 연결해야 한다.
박사학위가 흔들리는 이유는 학위가 쓸모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학위가 담고 있는 전문성이 변화한 사회의 요구에 맞게 재구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위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학위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제 박사학위자는 지식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지식을 움직이는 사람이어야 한다.
박사학위의 시대가 끝난 것이 아니다. 낡은 박사관의 시대가 끝나고 있을 뿐이다.
이제 다음 질문은 분명하다. 인공지능이 지식의 희소성을 무너뜨리는 시대에, 박사는 무엇으로 자신의 전문성을 증명할 것인가.
▷법학박사, 선진사회정책연구원 원장
▷한국정책연구원 원장
▷(사)한국공공정책학회 부회장, 상임이사
▷(전)국민대학교 행정대학원 외래교수
▷(전)서울특별시의회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