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역사] 143. 오키나와 식량 혁명의 시작, 1605년 노구니소칸의 고구마 도입 진실

노구니 소칸이 가져온 한 줌의 묘목이 역사를 바꿨다

기마 신조(儀間真常)가 완성한 류큐 최초의 식량 혁명

사쓰마 번(薩摩藩) 침공 속 민중을 살린 생명줄

1605년, 류큐(琉球) 왕국 역사에서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거대한 혁명이 시작됐다. 총칼도 아니었고, 거대한 함선도 아니었다. 중국 푸저우(福州)에서 돌아온 한 진공선(進貢船)이 가져온 작은 고구마 묘목이 그 출발이었다.

 

그 중심에는 노구니 소칸(野国総管)이 있었다. 그는 중국과의 조공 무역을 담당하던 진공선의 총관(総管)이었으며, 본명 대신 고향인 노구니 촌(野国村)과 직책명이 결합된 이름으로 역사에 남았다. 

 

그는 중국 체류 중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 고구마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태풍과 흉년에 시달리던 류큐 백성들에게 이 작물이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귀국한 노구니 소칸은 자신의 고향 일대에서 시험 재배를 시작했다. 이것이 오키나와 본섬(혼섬) 최초의 고구마 재배였다. 이전까지 류큐 농업은 태풍과 가뭄 앞에서 극도로 취약했다. 벼와 보리는 기후 변화에 쉽게 무너졌고, 흉년이 들면 곧바로 굶주림과 아사로 이어졌다.

 

하지만 고구마는 달랐다. 땅속에서 덩이뿌리를 키우기 때문에 태풍 피해가 적었고, 류큐석회암 지대의 메마른 토양에서도 강한 생명력을 보였다. 바로 이 점이 류큐 농업의 판도를 바꾸었다.

 

노구니 소칸이 ‘도입자’였다면, 이를 류큐 전역으로 확산시킨 인물은 기마 신조(儀間真常)였다. 당시 지방 행정 단위인 마기리(間切)의 지두(地頭)였던 그는 고구마의 가능성을 즉시 간파했다. 단순히 묘목을 심는 데 그치지 않고, 오키나와의 토양과 기후에 맞는 재배법을 연구하며 체계적으로 보급 정책을 추진했다.

 

기마 신조의 노력은 단순한 농업 정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류큐 민중 전체의 생존 전략이었다. 고구마는 빠르게 류큐 각지로 퍼졌고, 흉년과 기근을 견디게 해주는 구황 작물로 자리 잡았다. 이전까지 기후에 휘둘리던 농업 구조 자체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이 변화가 더욱 극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시기 때문이다. 노구니 소칸이 고구마를 들여온 1605년은, 류큐 왕국이 거대한 재난 직전에 놓여 있던 시기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역 요구 이후 사쓰마 번의 압박은 점점 거세졌고, 결국 1609년 사쓰마 군대가 류큐를 침공했다.

 

류큐의 고구마가 사츠마이모로 바뀐 이유 [이미지=AI 생성]

 

침공 이후 류큐는 막대한 상납금과 조세 수탈에 시달렸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재배한 곡물을 빼앗겼고, 만성적인 빈곤 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이 상황에서 고구마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민중의 생존을 지탱하는 마지막 방어선이 되었다.

 

만약 고구마가 본섬에 미리 보급되지 않았다면, 류큐 민중은 사쓰마 지배 초기의 식량난 속에서 훨씬 더 거대한 참사를 겪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고구마는 자연재해와 정치적 수탈이라는 이중 재난 속에서 오키나와 사람들을 살아남게 만든 생명의 작물이었던 셈이다.


 

1605년 노구니 소칸이 중국 푸저우에서 가져온 고구마는 단순한 외래 작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류큐 왕국의 농업 구조를 바꾸고, 태풍과 흉년을 견디게 만든 ‘식량 혁명’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기마 신조의 체계적인 재배 연구와 보급 정책은 이 작물을 류큐 민중 전체의 생명줄로 정착시켰다. 

 

특히 1609년 사쓰마 침공 이후 고구마는 가혹한 수탈 속에서도 오키나와 민중의 생존을 지탱한 결정적인 구황 작물로 남게 되었다.

작성 2026.05.09 09:27 수정 2026.05.09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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