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짐과 상실의 시대, 베아트리체 알레마냐가 건네는 조용한 위로

사라지는 것들을 통해 삶의 본질을 묻는 그림책

어린이를 위한 동화가 아닌, 어른을 위한 철학적 에세이

트레이싱지라는 물성으로 구현한 ‘일시성’의 미학

비워짐과 상실의 시대, 베아트리체 알레마냐가 건네는 조용한 위로

 

 

 

현대인은 매일 무언가를 잃으며 살아간다. 젊음은 서서히 사라지고, 관계는 느슨해지며, 익숙했던 감정조차 어느 순간 낯설어진다. 디지털 시대는 모든 것을 빠르게 소비하고 빠르게 잊게 만들었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오래된 것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런 시대 속에서 베아트리체 알레마냐의 『사라지는 것들』은 매우 조용한 목소리로 독자 곁에 다가온다.

 

이 책은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삶의 무상함과 존재의 일시성을 다루는 철학적 에세이에 가깝다. 작가는 낙엽, 음악, 비눗방울, 잠, 두려움, 시간처럼 붙잡을 수 없는 존재들을 이야기하며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 자체가 ‘사라짐’의 연속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히 상실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라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 그리고 그 속에서도 끝내 남는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라지는 것들』은 요란한 위로를 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가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동안, 삶에서 지나가 버린 것들을 천천히 떠올리게 만든다. 그것이 이 작품이 어린 독자보다 오히려 성인 독자들의 마음 깊숙이 침잠하는 이유다.

 

책은 매우 단순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살다 보면, 많은 것들이 사라진단다.”

 

이 짧은 문장은 어른들에게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어린 시절에는 영원할 것 같았던 계절도, 사람도, 감정도 결국은 변하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살아가며 배운다. 작가는 그런 인간의 숙명을 거창한 철학 용어 대신 아주 일상적인 이미지들로 풀어낸다.

 

손 위의 새는 날아가 버리고, 음악은 허공 속으로 흩어진다. 풍성한 머리카락은 세월 속에서 사라지고, 두려움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흐려진다. 작품은 삶 속에서 사라지는 모든 것들을 하나씩 보여 주면서도 그것을 비극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이 담담함이야말로 작품의 가장 강력한 힘이다. 현대인은 끊임없이 붙잡으려 한다. 젊음도, 관계도, 감정도 영원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알레마냐는 인간이 가진 그런 집착을 부드럽게 내려놓게 만든다. 모든 것은 흐르고 변한다는 진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독자는 오히려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서 조금 자유로워진다.

 

『사라지는 것들』이 특별한 이유는 단지 메시지 때문만이 아니다. 이 작품은 책이라는 물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사라짐’을 독자가 직접 경험하도록 만든다.

 

작가는 트레이싱지라는 반투명 종이를 사용했다. 독자가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그림은 변형되고, 이전의 장면은 사라진다. 새가 손에서 날아가 버리고, 감겨 있던 눈이 떠지며, 김이 휘핑크림으로 변하는 장면들은 단순한 시각 효과를 넘어선다. 독자는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 자체를 통해 ‘변화’와 ‘소멸’을 체험하게 된다.

 

특히 이 장치는 디지털 시대에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오늘날 콘텐츠는 빠르게 소비되고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사라지는 것들』은 종이를 직접 넘기는 아날로그적 경험을 통해 사라짐의 감각을 매우 천천히 체험하게 만든다. 이는 단순한 독서가 아니라 감각적 명상에 가깝다.

 

알레마냐의 그림 또한 인상적이다. 거칠고 자유로운 선, 따뜻한 색감, 아이의 낙서 같은 표현은 완벽함보다 감정을 우선시한다. 이는 현대 사회가 강요하는 정교함과 효율성에 대한 조용한 저항처럼 느껴진다. 그림은 정답을 설명하지 않고, 독자가 스스로 감정을 발견하도록 여백을 남긴다.

 

 

팬데믹 이후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자주 상실을 경험하게 되었다. 관계는 멀어졌고, 익숙했던 일상은 쉽게 무너졌다. 많은 이들이 불안과 공허 속에서 살아간다. 『사라지는 것들』은 바로 그런 시대에 더욱 의미 있게 읽힌다.

 

이 책은 상실을 극복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상실은 삶의 일부이며, 결국 지나가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우울함도, 두려움도, 슬픔도 언젠가는 사라진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마지막 메시지다. 작가는 세상 모든 것이 사라질 수 있어도 단 하나 남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바로 사랑이다. 부모와 아이 사이의 사랑은 작품 마지막에서 직접적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조용한 이미지 속에서 강하게 암시된다.

 

이 결말은 단순한 감동을 넘어선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 속에서도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감정은 결국 사랑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가족일 수도 있고, 기억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를 향한 오래된 마음일 수도 있다.

 

베아트리체 알레마냐의 『사라지는 것들』은 짧은 그림책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울림을 남긴다. 이 작품은 어린이에게는 변화와 성장의 의미를, 어른에게는 상실과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법을 이야기한다.

 

특히 성인 독자들에게 이 책은 오래 잊고 있었던 감정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지나가 버린 계절, 멀어진 사람들, 사라진 기억들 속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조용히 깨닫게 한다.

 

빠르게 소비되고 잊히는 시대에 『사라지는 것들』은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드문 책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독자는 알게 된다. 결국 사라지는 것들 속에서도 끝내 남아 우리를 붙드는 것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삶을 바꾸는 동화 신문 기자 kjh0788@naver.com
작성 2026.05.07 09:13 수정 2026.05.12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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