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교로 본 그리스도의 삼중직무와 말씀 제자도


장재형 목사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삼중직무, 말씀의 능력, 제자도와 교회의 사명을 깊이 묵상합니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에는 하루의 노동을 멈춘 두 사람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서 있다. 흙 묻은 손, 낮게 깔린 하늘,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 같은 침묵은 인간의 삶이 단지 먹고사는 일만으로 완성되지 않음을 말해 준다. 밭 한가운데서도 영원을 향해 마음을 여는 순간이 있다. 신앙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된다. 익숙한 생계와 책임, 붙들고 있던 안전의 세계 속으로 주님의 음성이 들어올 때, 우리는 비로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묻게 된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 대학교 설립의 설교가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삼중직무는 이 질문에 대한 복음적 대답이다. 예수님은 갈릴리 전역을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의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다. 가르침, 전파, 치유. 이 세 가지는 예수님의 사역을 설명하는 기능적 구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삶 속으로 임하는 방식이었다. 말씀은 무지한 마음을 깨우고, 복음은 죄인을 은혜로 부르며, 치유는 상처 입은 존재를 다시 일으킨다.

갈릴리의 빛, 제자를 부르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었다. 그분의 말씀은 사람의 내면을 비추고, 굳어진 생각을 깨뜨리며,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했다. 참된 성경 묵상은 머리로 이해한 교리를 가슴의 회개와 손발의 순종으로 이어 가는 일이다. 그래서 교회가 가르치는 공동체가 된다는 것은 성경 공부의 횟수를 늘리는 문제를 넘어선다. 말씀을 통해 사람이 변화되고, 변화된 사람이 다시 세상 속에서 복음을 살아 내도록 세우는 일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따랐다. 그물은 단지 낡은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생계였고, 내일의 안전이었고, 가족과 함께 살아가던 삶의 울타리였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은 그 모든 익숙함보다 더 큰 영광을 보여 주었다. 믿음은 현실을 무시하는 무모함이 아니라, 현실보다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용기다제자의 길은 잃어버리는 길이 아니라, 무엇이 영원히 남는가를 배우는 길이다.

누가복음의 제자도 역시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은 소유가 있어야만 안전하다고 믿는 마음을 흔든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는 말씀은 관계를 버리라는 냉정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부르심이 가장 깊은 우선순위가 되어야 함을 가르친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말씀은 사명의 길에서 자꾸 과거의 안전지대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비춘다. 제자는 앞으로 부름받은 사람이다.

떡의 유혹을 넘어 말씀의 길로

마태복음 4장의 광야 시험은 제자의 길이 왜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예수님은 돌로 떡을 만들라는 물질의 시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왜곡된 신뢰의 시험, 세상 만국의 영광을 주겠다는 명예와 권력의 시험 앞에 서셨다. 인간이 무너지는 자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흔들리고, 사랑과 보호를 자기 방식으로 요구하며, 인정받고 높아지고 싶은 욕망에 쉽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선언은 현실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지탱하는 더 깊은 근거가 하나님께 있음을 밝히는 고백이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은 믿음이 기적을 강요하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는 순종임을 가르친다.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는 명령은 인간의 영혼이 어디에 무릎 꿇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제자의 정체성을 중요하게 드러낸다. 시험은 언제나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방식으로 다가온다. 내가 누구인지 잊는 순간, 물질은 주인이 되고 관계는 집착이 되며 명예는 우상이 된다. 그러나나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믿음이 살아 있을 때, 흔들리던 마음은 다시 말씀 위에 선다.

여기서 소유의 문제는 더 깊어진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는 현실의 필요를 외면하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먼저 구하는 질서 안에서 양식을 구하라는 말씀이다. 재물은 맡겨진 것이지 숭배할 것이 아니다. 청지기는 가진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그것이 자신을 지배하게 두지도 않는다. 필요할 때 내려놓을 수 있는 자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순종, 그것이 은혜 안에서 배우는 물질의 질서다.

말씀을 밝히 알 때 기쁨이 회복된다

그리스도의 삼중직무가 교회 안에서 살아 움직이려면 공동체는 말씀에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 디모데전서가 말하듯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일에 전념할 때, 교회는 복음을 바르게 전할 힘을 얻는다. 말씀을 알지 못하면 가르칠 수 없고,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면 전파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지 못하면 상처 입은 사람을 온전히 섬길 수 없다.

느헤미야 8장에서 에스라가 율법책을 낭독했을 때, 백성들은 말씀을 듣고 울었다. 그러나 그 눈물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았다. 말씀의 뜻을 밝히 알게 되었을 때, 그들에게는 큰 기쁨이 찾아왔다. 말씀은 때로 우리 안의 죄를 비추고, 무뎌진 마음을 깨우며, 잃어버린 회개의 자리를 다시 열어 준다. 하지만 그 끝에는 정죄가 아니라 회복이 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힘이 다시 생기고, 공동체는 복음 안에서 새로워진다.

오늘의 교회가 프로그램과 행사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활동이 많아도 말씀이 약하면 영혼은 메마른다. 반대로 말씀을 사모하고, 서로 권면하며, 배운 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공동체는 작아 보여도 생명의 힘을 지닌다. 장재형 목사의 신학적 통찰은 교회가 말씀을 듣는 장소를 넘어, 말씀을 살아 내고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일깨운다.

대사명도 결국 이 말씀의 흐름 안에 있다.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풀며,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은 교회의 존재 이유를 분명히 한다. 복음은 개인의 위로에서 멈추지 않는다. 배운 말씀은 권면이 되고, 권면은 전파가 되며, 전파는 다시 한 사람을 제자로 세우는 생명의 순환이 된다.

가르치고 전하고 고치는 사랑의 사명

예수님의 치유는 병든 몸만을 향하지 않았다. 약한 자, 고통받는 자, 상처 입은 자를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었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삼중직무를 따른다는 것은 예배당 안에 머무는 신앙을 넘어서는 일이다. 가정과 직장, 학교와 병원, 지역 사회와 세상의 아픈 자리에서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며, 사랑으로 고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도행전의금과 은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라는 고백은 이 사명의 본질을 선명하게 한다. 교회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깊은 선물은 단지 제도나 물질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서는 생명, 죄인을 회복시키는 은혜, 절망한 사람을 다시 걷게 하는 소망이다. 물론 현실적 도움과 구체적 섬김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 모든 섬김의 중심에는 사람을 살리는 복음이 있어야 한다.

이 길을 걷기 위해 우리는 소유를 절대화하지 않아야 한다. 재물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재물이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이 문제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지식, 재능, 관계, 기회, 물질은 모두 청지기적 사명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움켜쥐면 두려움이 커지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흘려보내면 은혜의 통로가 된다. 믿음은 삶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흐를 자리를 넓힌다.

결국 장재형 목사 설교가 남기는 질문은 단순하면서도 깊다. 나는 오늘 무엇을 배우고,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며, 어떤 상처를 사랑으로 어루만지고 있는가. 갈릴리 호숫가에서 울렸던나를 따르라는 음성은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도 우리의 일상 한가운데, 손에 쥔 그물과 마음의 두려움 위로 조용히 들려온다.

교회가 이 사명을 회복할 때, 세상은 단지 종교적 언어를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보게 된다. 다투고 병든 자리가 화해와 치유의 자리로 바뀌고, 절망의 언어가 소망의 고백으로 변한다. 그때 가르침은 차가운 지식이 아니라 사랑의 길잡이가 되고, 전파는 외침을 넘어 생명의 초대가 된다. 그 음성 앞에서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다시 붙들어야 할 말씀은 무엇인가. 그 질문이 오래 남는 자리에서, 참된 제자의 길은 다시 시작된다.

 

davidjang.org




작성 2026.05.05 22:57 수정 2026.05.05 22:57

RSS피드 기사제공처 : 굿모닝매거진 / 등록기자: 최우석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해당기사의 문의는 기사제공처에게 문의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