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반 류큐(琉球) 왕국은 거대한 세계사적 파도 앞에 놓여 있었다. 산업혁명을 거친 서구 열강은 아시아에서 새로운 시장과 보급 거점을 찾고 있었고, 류큐는 일본 본토와 중국 사이에 위치한 전략적 섬으로 주목받았다.
이미 영국, 프랑스, 선교사 베텔하임 등이 류큐에 접근하며 통상과 포교를 요구하고 있었고, 류큐 왕부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시간을 끌며 요구를 거절하는 방식으로 버텨왔다.
1853년 미국의 매슈 페리(Matthew C. Perry) 제독은 일본 개국을 압박하기 위해 우라가(浦賀)로 향하기 전, 먼저 나하항(那覇港)에 입항했다. 미국은 류큐가 사쓰마번(薩摩藩)의 간접 지배 아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일본 교섭이 실패할 경우 류큐를 점령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즉 류큐는 미국에게 보급 거점이자 압박 카드였다.

페리 함대는 사스케하나호를 비롯한 4척의 흑선을 이끌고 나하에 나타났다. 함대는 류큐에 머물며 항구와 내륙을 조사했고, 석탄과 식수, 식량 공급 가능성까지 살폈다.
류큐 왕부가 통상과 자유로운 물자 공급 요구를 피하려 하자, 페리는 무력 시위를 선택했다. 무장한 해병대와 군악대를 앞세워 슈리성으로 행진했고, 왕부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강제 입성했다. 이는 류큐 왕국의 심장부가 서구 군사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사건이었다.
1854년 페리는 일본 막부와 일미화친조약(日米和親条約)을 체결한 뒤 다시 류큐로 돌아왔다. 그리고 7월 11일, 무력을 배경으로 류미수호조약(琉米修好条約)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미국인에게 물품 판매, 식수와 땔감 제공, 난파선 구조, 자유 행동 보장, 도선사 제공, 미국인 묘지 설치와 보호 등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형식은 수호였지만 실질은 류큐가 미국의 편의를 보장해야 하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사쓰마번의 계산이었다.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는 서구의 접근을 단순한 위협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는 류큐를 앞세워 서양과 접촉하고, 그 과정에서 신식 군함과 무기를 도입하려 했다.
류큐는 겉으로는 독립 왕국처럼 조약을 맺었지만, 실제로는 사쓰마번의 전략적 도구로 활용되고 있었다. 류큐는 미국의 압박과 사쓰마의 계산 사이에 끼인 약소국이었다.
서구와 류큐 민중의 충돌도 발생했다. 미군 수병 윌리엄 보드가 나하에서 술에 취해 민가에 침입하고 노파에게 폭행을 가하자, 분노한 주민들이 그를 해안가로 몰아붙였고 보드는 바다에 빠져 사망했다. 페리는 강하게 항의했고, 류큐 왕부는 미국 측 입회 아래 재판을 열어 사태를 수습했다. 이 사건은 서구 군사력의 폭력적 진입이 류큐 민중의 일상과 충돌한 상징적 장면이었다.
페리의 내항은 단순한 외교 사건이 아니었다. 이후 류큐는 프랑스, 네덜란드와도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되었고, 일본 본토의 개국으로 인해 류큐가 오랫동안 의존해 온 중계 무역의 가치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류큐 왕국의 경제적 기반과 외교적 독자성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이는 훗날 류큐 처분으로 이어지는 쇠퇴의 출발점이 되었다.
1853년 페리 제독의 류큐 내항과 슈리성 강제 입성은 류큐 왕국이 서구 제국주의의 군사적 압박 앞에 직접 노출된 결정적 사건이었다.
1854년 류미수호조약은 류큐의 외교적 약점을 드러낸 불평등 조약이었고, 그 배후에는 류큐를 이용해 서구 기술을 얻으려는 사쓰마번의 계산이 있었다. 이 사건은 류큐의 중계 무역 기반을 흔들고, 왕국 멸망으로 이어지는 긴 쇠퇴의 문을 연 비극적 전환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