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란은 사소한 댓글 하나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그 작은 균열 속에는 이 시대가 품고 있는 더 큰 균열이 고스란히 비쳐 있었다.
누군가는 상식적인 글에 비아냥으로 응답했고, 그 비뚤어진 시선은 단순한 의견의 차이를 넘어 타인을 향한 경멸로 드러났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댓글의 주인공이 보여준 삶의 이력—명문대, 통계, 데이터 과학, 인공지능—이 오히려 충격을 더했다.
이는 마치 정교하게 벼려진 칼을 떠올리게 한다.
맹자(孟子)께서는 일찍이 말씀하셨다.
"人不可以無恥, 無恥之恥, 無恥矣"
(사람은 부끄러움이 없어서는 안 되니,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움이 없게 될 것이다.)
자신의 무례함을 비판하는 이들을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라 박제하며 당당해하는 그 오만함 속에는, 지식은 있을지언정 인격의 최소 안전장치인 '부끄러움'은 실종되어 있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치욕임을 깨닫지 못하는 무감각(無感覺)의 상태, 이야말로 성현들이 경계한 구제 불능의 경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채근담(菜根譚)의 한 구절은 지식의 허망함을 꾸짖는 뼈아픈 일침(一鍼)이 아닐 수 없다.
"讀書不見聖賢, 爲鉛槧傭"
(책을 읽으면서 성현의 마음을 보지 못하면, 그저 글 쓰고 기록하는 연필의 하인일 뿐이다.)
데이터를 다루고 인공지능을 설계하는 기술이 아무리 화려한들, 그 바탕에 인간을 향한 예(禮)와 측은지심이 없다면 그는 기계에 고용된 정교한 도구에 불과하다. 10대와 20대 사이에서 퍼지는 이른바 '냉소적 보수화'와 '수구화'의 물결이, 심지어 지성을 대표한다는 여성 엘리트에게서조차 독선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현실은 참담하다.
이들이 장차 우리 사회의 중추가 되어 높은 자리에 앉았을 때를 상상해 본다. 낮은 곳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데이터의 차가운 수치로만 세상을 재단하는 이들이 과연 이웃을 보살피겠는가?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의관도(衣冠盜, 옷 입은 도둑놈)'가 되어 자신만의 성을 쌓지는 않겠는가?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그들이 쥐게 될 '지능의 칼날'이다. 우리는 이미 2026년 상반기 미국-이란 갈등 속에서 그 전조를 보았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다던 '앤스로픽(Anthropic)' 같은 기업조차 자신들이 만든 인공지능 '클로드'를 군사 작전의 목표 식별과 시뮬레이션에 제공했고, '팔란티어'는 데이터 분석으로 살상의 표적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기술이 권력에 굴종하고 생명을 숫자로 치환할 때 발생하는 비극을 목도한 것이다.
강대국의 패권과 트럼프 행정부의 압력에 영혼을 파는 기술 기업들의 모습처럼, 만약 우리 사회의 젊은 엘리트들이 '수구 보수화'된 사고방식에 인공지능이라는 강력한 무기까지 장착한다면 그 결과는 명약관화하다. 인격이 결여된 지능은 그저 정교한 폭력일 뿐이다.
나이 든 세대의 고집보다 더 무서운 것은, 세상을 열어나갈 젊은이들의 '닫힌 마음'이다. 지식은 머리의 장식이 아니요, 타인을 짓밟는 무기는 더더욱 아니다. 부디 그들이 차가운 숫자의 세계에서 잠시 벗어나, 잃어버린 '사람의 얼굴'과 '부끄러움의 온도'를 되찾기를 바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