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과론이지만 요한계시록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낸 문서입니다. 정확하게 일곱 교회 형편을 말한 내용은 편지 형식입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나머지 내용은 예배 실황 중계 형식입니다. 그 일곱 교회를 말하는 중에 에베소 교회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까지 에베소 교회에서 사역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일곱 교회를 지도에서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일곱 교회가 옹기종기 모여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 일곱 교회를 대표할 만한 교회가 어디겠습니까? 당연히 에베소 교회 아니겠습니까?
사도행전에 나온 에베소 교회 형성 과정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지역 복음화를 꿈꾸며 2차 전도를 계획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계획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마케도니아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빌립보를 비롯한 유럽 지역으로 전도 방향이 바뀝니다. 바울 사도가 펼친 2차 전도를 보며 응답하는 기도를 배웁니다. 응답받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뜻에 반응하는 기도입니다.
사도 바울이 세 차례에 걸친 전도 여정을 보십시오. 1차 전도에서는 전도자 바울을 봅니다. 2차 전도에서는 목회자 바울을 봅니다. 고린도에 장기 체류하면서 목양에 전념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도모한 3차 전도는 어떻습니까? 에베소에서 2년 넘게 머물며 어떤 일을 했습니까? 이른바 두란노 서원에서 펼친 사역은 한마디로 전문인 양성입니다. 에베소를 중심으로 한 3차 전도에서 신학자 바울을 봅니다.
사도 바울 진면목은 어느 사역에서 볼 수 있습니까? 전도자와 목회자, 그리고 신학자 중 바울다운 모습은 무엇입니까? 아무래도 신학자 바울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신학자 바울은 전도자와 목회자로 다듬어진 결과치입니다. 그러니 전도자와 목회자가 아니었다면 신학자 바울은 어설픕니다. 다른 학문과 달리 신학자는 전도자와 목회자로 다듬어진 결과입니다. 따라서 전도와 목회 경험치가 없는 신학은 그야말로 엉성함 그 자체입니다. 알고 보면 에베소 사역은 미루어두신 하나님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사역은 준비해 둔 사람까지 달랐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니 고린도 사역은 목회자 바울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교회를 책임진 목회자라면 쉽게 이동할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후입자가 세워진다면 다른 계획을 실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 아볼로가 등장함은 의미심장합니다. 그 아볼로를 누가 고린도 교회에 추천했습니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눈여겨보고 추천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해박한 성경 지식에 언변까지 겸비한 인물입니다. 단지 예수님을 아는 영적 이해가 조금 부족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그를 데려와 예수님에 관해 세세하게 가르쳐줍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아볼로는 사도 바울 빈자리를 넉넉히 채웠습니다. 그러니 바울로서는 에베소 복음화에 전념할 기회를 얻은 셈입니다. 여기에 주님께서 미리 준비해둔 이들이 열둘이나 있었습니다(행 19:1-7). 에베소에서 바울은 어떤 제자들을 만나 직설화법으로 물었습니다. 그 물음에 그들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합니다. 도대체 바울이 던진 질문이 무엇이기에 대답하지 못했습니까? 까놓고 우리에게 그 질문을 내놓는다면 쉽게 답할 수 있겠습니까?
자그마치 제자랍시고 행세하는 이들이 열두 명이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던진 질문에 그 누구도 답하지 못합니다. 유대 본토가 아닌 에베소에서 제자라는 말을 쉽게 하겠습니까? 경건한 삶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자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열두 명이 제자임을 드러냄은 남들과는 다르게 살았다고 보입니다. 저는 그 다른 삶을 "신앙의 결"이라고 부릅니다. 어떻게든 거룩한 삶을 살고자 애쓰는 그 자세를 보며 바울이 묻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 19:2 상)
신앙 질문일수록 정곡을 찔러야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어디든 찌르면 피는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심장을 찌르지 않는다면 생명과 연결된 피를 보겠습니까? 신앙 질문은 사느냐 죽느냐를 판가름하는 물음입니다. 그러니 제대로 정곡을 찔러야 합니다. 열두 명이 한패가 되어 신앙인 행세를 하며 다닙니다. 웬만해선 두려울 게 없는, 살맛 나는 신앙 아닙니까? 목회하다 보니 패거리 신앙인들을 여럿 만나보았습니다. 그들을 숫자를 무기인 양 자랑하며 작은 교회 목사인 제게도 흥정합니다. 바울과 마주한 그 열두 사람도 그랬나 봅니다. 사람을 바꾸려면 성령 역사밖엔 답이 없습니다. 그러니 바울처럼 제대로 정곡을 찔러야만 합니다.
믿음이 있는 체하며 세력을 자랑하던 그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믿음 있음을 전제로 성령을 받았는지 묻습니다. 왜냐면 성령 없는 믿음이 무슨 믿음이겠습니까? 바울이 던진 질문은 이런 의미 아닙니까? 성령 받지 않았다면 믿음으로 치지도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들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성령을 받기는커녕 성령이란 말조차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했다고 모자람을 실토합니다.
신앙 지식은 모른다고 덮어둠이 미덕은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은 가만히 있으면 2등은 간다는 논리가 통하지 않습니다. 모를수록 드러냄이 신앙 지식을 채워가는 지름길입니다. 그들은 성령이란 말 자체를 몰랐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내세우는 신앙이 무슨 의미겠습니까? 바울은 그들에게 수준을 조금 낮춰 무슨 세례를 받았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나온 말이 "(세례자)요한의 세례"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에 방점이 있습니다. 회개란 뉘우침이며 돌이킴 아닙니까? 그들은 최소한 그 회개에 초점을 맞춘 삶을 살았다고 보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에베소에서까지 제자로 살 까닭은 없습니다.
솔직히 요즘 세상사를 보십시오. 기독교인임에도 신자임을 드러내지 않는, 숨은 교인을 보십시오. 소위 가나안 성도를 비롯한 은둔형 신자들이 제법 많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신자됨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위해 바울은 기도하고 안수합니다. 그러자 성령이 그들에게도 임하셨습니다. 열두 명이나 되는 모두가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성령충만을 받았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처럼 성령세례 받은 준비된 이들과 함께했습니다. 그러니 에베소 교회 처음 신앙은 어떤 색깔이었겠습니까? 그러면 세월이 흘러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에베소 교회는 어떻습니까? 시간이 흐른 만큼 신앙 색깔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같은 색깔입니까, 아님 달라졌습니까? 안타깝게도 요한계시록에서 보는 에베소 교회는 변색 혹은 변질 아닙니까?
이참에 우리 신앙 색깔은 어떤지 묻고 싶습니다. 처음 믿을 때와 지금, 내 신앙 색깔은 어떻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