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 1일 오전, 광주 북구 우산동의 한 골목에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풍경이 펼쳐졌다. 문을 여는 소리, 사람 냄새, 그리고 책 냄새. 한때 화려했던 이 거리는 오랜 시간 빈 간판과 닫힌 셔터로 가득했다. 상인들이 떠나고, 손님들이 발길을 끊고, 골목은 서서히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 자리에, 4월 1일 광주포도책방이 그랜드 오픈했다.
문을 열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광주·전남은 물론 서울 등 수도권, 부산까지 전국 각지에서 소식을 듣고 찾아온 이들이었다. 이날의 풍경은 단순한 서점 개업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침묵해온 골목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포도책방? '공유서점'의 새로운 실험
광주포도책방은 한마디로 '사람들이 함께 운영하는 서점'이다. 200~300명에 달하는 점주들이 각자 책을 선별하고, 굿즈를 만들고, 이야기를 담아 이 공간에 입점한다. 유명 출판사의 신간이 늘어선 대형서점과도 다르고, 한 명의 큐레이터가 취향을 고르는 소규모 독립서점과도 다르다. 포도책방은 수백 명의 취향이 한 공간에 공존하는 서점이다. 포도 한 송이가 수많은 알갱이로 이루어지듯, 책방의 이름처럼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가 한 공간에 빼곡히 모였다.
운영 방식은 간결하다. 점주는 책장이나 매대 등 원하는 부분을 분양 받아 자신이 소개하고 싶은 책이나 굿즈를 전시하고 포도책방에 위탁한다. 판매가 이루어지면 수익을 포도책방과 나눈다. 점주는 1년간의 입점비만 내면 별도의 월 임대료나 고정비 없이 자신의 상점을 가질 수 있고, 포도책방은 수백 명의 점주가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큐레이션으로 채워진다. 자본이 아니라 취향이 서점을 만드는 구조이다.
이 모델이 특별한 이유는 점주 한 명 한 명이 책방의 홍보대사가 된다는 데 있다. 자신의 책이 진열된 공간을 가족과 친구, 지인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200명의 점주는 곧 200개의 네트워크이자, 200개의 입소문이다. 오픈 첫날부터 유독 많은 사람이 몰린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
"제가 고른 책이 낯선 누군가에게 닿는다는 게 신기하고 설레요.
점주가 된다는 건 독자와 연결되는 일이더라고요."
- 아침꽃정원 점주 정승준 님-



책방을 품은 카페 '카페숲안에', 1층부터 루프탑까지
포도책방과 함께하는 '카페숲안에'는 이 공간의 또 다른 중심축이다. 카페숲안에는 1층부터 4층, 그리고 루프탑까지 테이블이 이어진다. 단순한 카페가 아니라 책방 전체에 스며든 공간이다. 방문객은 어느 층에 있든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책장 사이를 거닐다 마음에 드는 테이블에 앉아 책을 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다.
1층은 거리에서 바로 이어지는 열린 입구다. 지나가던 이들이 커피 향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들이는 공간이다. 포도책방 인포메이션 데스크와 카페숲안에가 있으며 이끼정원과 식물이 가득한 플랜터를 만날 수 있다. 위로 올라갈수록 분위기는 점차 조용하고 내밀해진다. 2층은 라운드형 책장과 전시장 그리고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3층은 라운드형 책장과 사무실, 4층은 조경&정원책방과 단체석, 회의테이블 등이 있는 곳으로 이벤트 행사가 열리는 메인공간이 되기도 한다. 광주포도책방은 책을 고르다 마음에 드는 층의 테이블에 앉아 오래 머무는 것이 이 공간에서의 자연스러운 동선이다.
그리고 루프탑이 있다. 광주의 하늘을 올려다 보거나 무등산 정상을 바라볼 수 있으며 얼마 남지 않은 우산동의 기와지붕을 내려다 보며 책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경험을 만끽할 수 있다. 아울러 따스한 햇살을 벗삼아 커피를 마시는 즐거움은 광주포도책방이 주는 감각 중에서도 각별한 것이다. 날씨 좋은 봄날 오후, 루프탑의 자리가 먼저 채워질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카페숲안에는 단지 책방에 딸린 카페가 아니다. 사람들이 이 건물에서 더 오래 머물게 만드는, 체류의 이유이기도 하다.


골목을 무대로 만드는 프로그램들
포도책방이 단순한 공간이 아닌 이유는 매주 이 공간을 채우는 프로그램에 있다. 북콘서트, 독서모임, 음악회, 강연회 등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매주 정기적으로 열리는 살아있는 문화 무대가 된다.
북콘서트는 저자나 점주가 독자와 직접 만나는 자리이다. 책을 읽은 사람과 책을 쓴 사람이 한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독서모임은 같은 책을 읽고 서로 다른 해석을 가져온 사람들이 만나는 자리이며, 음악회는 책과 음악이 같은 공간에서 흐르는 아름다운 저녁을 만든다. 강연회는 문화와 예술, 조경, 가드닝, 지역 이슈 등 다양한 주제로 전문가와 시민이 연결되는 장이다.
이 프로그램들은 포도책방을 '이번 주 한 번, 다음 주 또 한 번' 방문할 이유로 만든다. 단골이 생기는 공간, 커뮤니티가 형성되는 공간 바로 이런 점이 골목에 생기를 불어넣는 가장 확실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4층 조경&정원책방, 녹색 커뮤니티의 새 거점
포도책방의 4층은 조경인과 가드너를 위한 전용 공간이다. 조경&정원책방이라는 이름 아래, 조경 관련 종사자들이 점주로 직접 참여해 조경·원예·가드닝 관련 도서를 큐레이션했다. 조경 전문 도서를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공간이 국내에서 극히 드문 현실에서 이 4층은 단순한 서가를 넘어선 의미를 갖는다.
조경 현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실무자가 선별한 책들, 가드닝에 깊이 빠져든 애호가가 소개하는 원예서, 조경 설계와 식물 이야기가 담긴 국내외 전문서적 등 4층은 조경 지식의 큐레이션된 아카이브가 된다. 책방이라는 공간이 업계의 정보 교류와 네트워크의 허브가 될 가능성을 이 층이 품고 있는 것이다.
가드닝 클래스와 조경 관련 교육 프로그램도 준비 중이다. 시민을 대상으로 한 녹색 감수성 교육, 전문가 간의 지식 나눔, 식물과 공간에 관심 있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워크숍 등 조경의 가치를 대중과 잇는 통로가 이 곳에서 열린다. 조경이 특수한 전문 영역이 아니라 일상의 문화로 스며드는 공간, 그것이 광주포도책방 4층이 지향하는 방향이다.
문화도시 광주에서, 책과 식물과 사람이 만나는 새로운 실험이 지금 시작됐다. 우산동 골목 한편에 자리 잡은 이 공간이, 조경계의 작지만 의미 있는 문화적 거점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구호전이 아닌 '우리단길'로
광주포도책방이 자리한 곳은 구호전이라 불리는 곳으로 오래 전 호남전기가 있던 곳이라 그리 불려졌다. 이곳은 한때 사람이 넘쳐나 광주에서 가장 활기차던 거리 중 하니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상권은 위축됐고 골목은 텅 비었다. 이곳에서 '상권 살리기'라는 구호는 낯설지 않다. 다양한 지원 사업과 캠페인이 이 거리를 지나갔지만 사람의 발걸음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포도책방은 구호 대신 콘텐츠를 택했다. 누군가를 억지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오고 싶어지는 이유를 만들었다. 매주 열리는 다양한 프로그램, 200여 점주들의 자발적 참여와 홍보, 1층부터 루프탑까지 이어지는 체류형 공간, 이 세 가지가 맞물리면 지역 주민은 물론 외지 여행객의 발길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서울의 서촌이 그랬고, 부산의 전포카페거리가 그랬다. '이유 있는 거리'는 사람을 모으고, 사람이 모인 거리는 또 다른 사람을 부른다. 구호전이 광주의 새로운 핫플레이스 명물 거리 '우리단길'로 불릴 날이 머지않았다는 기대가 나오는 이유다.
문화도시로서의 광주가 오랫동안 쌓아온 예술적 토양 위에, 포도책방은 '독자 중심'이라는 씨앗을 심었다. 관 주도의 문화 사업이 아닌,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문화 생태계가 우산동 골목에서 자라고 있다. 이 실험이 광주 골목 문화의 새로운 문법이 될 수 있을지,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도 지켜볼 이유는 충분하다.
광주포도책방이 이끄는 우리단길의 미래가 내심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광주포도책방
ㅇ 위치: 광주 북구 독립로402번길 5(우산동)
ㅇ 전화: 0507-1331-3338
ㅇ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podobooks.gwangju/
https://www.instagram.com/cafe_subane/
ㅇ 운영: 공유서점 · 카페 숲안에 (1층~루프탑)
ㅇ 정기 프로그램: 북콘서트, 독서모임, 음악회, 강연회 (매주)
ㅇ 4층 조경&정원책방: 가드닝 클래스 · 조경 교육 프로그램 예정
ㅇ 입점안내: https://forms.gle/o2wpePGA7kZLW6fg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