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칼럼] 왜 무슬림들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거부할까: 기독교와 갈라진 결정적 장면

아브라함의 두 아들이 벌이는 1400년 진리 전쟁: 당신이 몰랐던 유일신교의 비밀

알라와 하나님은 같은 신인가? 이슬람과 기독교, 본질을 꿰뚫는 차이

삼위일체 신 vs 절대 단일신, 종교의 벽 넘어 인간의 근원을 묻다

▲ AI 이미지, 중동디스커버리신문 제공

한 뿌리에서 난 두 줄기, 인류 역사를 바꾼 유일신 신앙의 결정적 차이와 공존의 길

 

인류 역사의 거대한 두 물줄기, 기독교와 이슬람.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이 두 신앙의 테두리 안에서 숨 쉬고 사랑하며 삶의 궤적을 그려 나간다. 겉으로 보기에 두 종교는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오직 한 분뿐인 창조주를 섬기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공유하고, 예언자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한 꺼풀만 들춰보면 그 속에는 양보할 수 없는 진리의 격돌과 세계관의 평행선이 존재한다.

 

오늘날 중동의 뜨거운 사막 풍경부터 뉴욕의 마천루, 서울의 도심 한복판에 이르기까지, 이 두 신앙의 만남은 때로 긴장으로, 때로 연대로 우리 곁에 다가온다. 무엇이 그들을 하나로 묶고, 무엇이 그들을 결정적으로 가르는가. 이 기사는 단순한 종교 지식의 나열을 넘어, 2천 년과 1천4백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인류의 영혼을 지배해 온 두 거인의 내면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그 속에 담긴 인간적인 고뇌와 신성한 가치를 추적한다.

 

아브라함이라는 한 뿌리, 그리고 엇갈린 두 갈래 길

 

기독교와 이슬람은 왜 같은 뿌리에서 시작되었음에도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을까. 그 해답은 역사의 시발점과 창시자의 정체성에서 찾을 수 있다. 기독교는 서기 1세기, 로마의 압제 아래 있던 유대 땅에서 나사렛 예수라는 인물의 등장과 함께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 예수는 단순한 도덕 교사를 넘어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류의 구원자'로 선포되었고, 그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절대적 기초가 되었다.

 

반면, 이슬람은 그로부터 약 600년 뒤인 7세기 초, 아라비아반도의 메카에서 시작되었다. 무함마드는 히라 동굴에서 대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고 선포하며, 타락한 세상을 향해 '절대 유일신'으로의 회귀를 외쳤다. 기독교가 '성육신(하나님이 인간이 됨)'이라는 신비에 기초한다면, 이슬람은 ‘절대 복종’이라는 질서 위에 세워졌다.

 

이러한 기원의 차이는 두 종교가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를 결정지었다. 기독교는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에 초점을 맞추었고, 이슬람은 창조주 앞에 단독자로 선 인간의 책임과 사회적 정의를 강조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한 아버지를 둔 형제 같으면서도, 장자와 차자의 길처럼 서로 다른 운명을 타고난 셈이다.

 

삼위일체와 절대 단일 신, 물러설 수 없는 신관의 대결

 

두 신앙을 가르는 가장 날카로운 칼날은 '하나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나타난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삼위일체'는 이슬람이 가장 강렬하게 거부하는 지점이다. 기독교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 격이 본질적으로 한 분의 하나님임을 고백한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공동체적이며 역동적임을 드러내는 신비다.

 

그러나 무슬림의 눈에 삼위일체는 다신교적 우상숭배에 가깝다. 이슬람의 신조인 '타우히드(Tawhid)'는 알라의 절대적 단일성을 천명한다.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그는 누구를 낳지도 않았고 태어나지도 않았다"라는 꾸란의 선언은 기독교의 '하나님의 아들' 교리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이슬람에서 예수(이싸)는 처녀 수태로 태어난 위대한 예언자이며 메시아이지만, 절대 신의 본질을 공유한 존재가 아니다.

 

이러한 신관의 차이는 경전의 이해로 이어진다. 기독교인은 구약과 신약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으로 믿으며,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둔다. 반면 이슬람은 꾸란만이 원형 그대로 보존된 최종 계시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성경의 이전 기록을 인정하면서도, 시간이 흐르며 인간에 의해 왜곡되었다고 본다. 결국, '최종 병기'로서의 꾸란과 '완성된 계시'로서의 성경이 각자의 진리 점유권을 놓고 마주 서 있는 형국이다.

 

은혜의 구원과 복종의 삶, 일상을 지배하는 신앙의 양식

 

일반적으로 종교는 추상적인 교리에 머물지 않고 신자들의 삶의 태도를 결정한다. 기독교의 구원 관은 '은혜'라는 단어로 집약된다. 인간은 스스로 구할 수 없는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기에,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을 믿음으로써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논리다. 이는 신자들에게 감사와 겸손, 그리고 타인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의 동기를 부여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슬람은 '행위와 복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인간은 본래 선하게 태어났으나 망각하는 존재이기에, 끊임없이 알라의 법도(샤리아)에 복종함으로써 심판의 날에 구원을 얻어야 한다. 하루 다섯 번 메카를 향해 엎드리는 '살라트', 수입의 일부를 나누는 '자카트' 등 '이슬람의 다섯 기둥'은 무슬림의 일상을 촘촘하게 규제하며 공동체의 결속력을 강화한다.

 

사회적 영향력 측면에서도 서로의 차이가 뚜렷하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개인의 양심과 자유를 강조하며 노예제 폐지, 여성 인권 신장 등 근대 민주주의의 토양을 마련했다. 반면, 이슬람은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는 '신정일치'적 성격이 강해, 법과 도덕이 하나로 통합된 거대한 사회 질서를 구축해 왔다. “알라 앞에서 모든 무슬림은 평등하다”라는 형제애는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이슬람만의 강력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십자가의 고난과 승천의 영광, 예수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두 신앙의 틈새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역설적이게도, 두 신앙 모두가 사랑하는 '나사렛 예수'에 대한 이해다. 기독교인들에게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진 사랑의 확증이자 신앙의 심장이다. 십자가가 없다면 부활도, 구원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이슬람에서 예수(이싸)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 중 한 명이지만, 절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 전능하신 알라가 자기의 의로운 예언자를 수치스러운 처형대에 내버려두지 않았다는 논리다. 꾸란은 예수가 죽지 않고 바로 하늘로 올림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즉, '죽음을 통과하고 부활한 승리'를 믿는 기독교와 '고난을 면제받은 승리'를 믿는 이슬람, 예수를 바라보는 이 두 개의 시선은 수천 년간 평행선을 달리며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 AI 이미지, 중동디스커버리신문 제공

공존의 길: 혐오를 넘어선 영혼의 응답

 

오랫동안 무슬림들이 사는 땅에서 그들과 함께 빵을 떼며 내가 깨달은 건, 그들이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신의 얼굴을 구하는 '진리를 갈구하는 목마른 나그네'들이라는 사실이다. 뜨거운 태양 아래 먼지투성이 바닥에 엎드려 알라를 부르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나는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갈망을 보았다.

 

우리는 흔히 교리의 차이를 날카로운 무기로 삼아 서로를 베어내곤 한다. 하지만 기독교의 진정한 정신은 내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면서도,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며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을 향해 용서를 구했던 예수의 심장이 우리 안에 흐른다면, 우리는 무슬림들을 적대감이 아닌 긍휼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수호한다는 명목 아래, 정작 그 진리의 주인께서 몸소 보여주신 '원수까지 사랑하라'라는 그 뜨거운 명령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국, 우리는 광막한 우주 속에서 '인간'이라는 연약한 존재로 함께 여행하는 동반자들이다. 이 시대의 진정한 영성은 정답을 외치는 목소리의 크기에 있지 않고, 상대방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먼저 내미는 따뜻한 손길에 있다. 우리는 여전히 같은 인생의 사막을 걷고 있으며, 그 길 위에서 우리가 보여주어야 할 건, 차가운 논쟁이 아니라 십자가 희생을 보인 따스한 예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무슬림 형제들이 말하는 '복종'이 실상은 창조주 앞에 모든 교만을 내려놓는 행위이고, 기독교가 말하는 '은혜'는 절대 방종이 아닌 가장 무거운 책임임을 서로가 깨닫는다면 좋겠다. 

 

이 시대의 진정한 영성이란, 내 신앙의 견고함을 지키면서도 상대방의 눈동자에 맺힌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넉넉함에 있다. 우리는 각자의 경전을 들고 서로 다른 예배당에 서 있지만, 결국, 인간이라는 부서지기 쉬운 존재로 이 거대한 우주를 여행하고 있다. "당신은 왜 믿는가?"라는 질문 앞에, 정답을 외치기보다 먼저 손을 내미는 온기가 그리운 계절이다.

작성 2026.04.19 02:36 수정 2026.04.19 02:37

RSS피드 기사제공처 : 중동 디스커버리 / 등록기자: 김종일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해당기사의 문의는 기사제공처에게 문의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