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琉球) 왕국의 공식 역사서 편찬 과정은 단순한 기록 사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배와 생존, 정통성과 외교가 한 권의 역사서 안에서 충돌한 정치 행위였다.
특히 하네지 쵸슈가 1650년에 편찬한 츄잔 세이칸(中山世鑑)과, 이후 이를 한문(漢文) 체제로 전면 개편한 츄잔 세이후(中山世譜)의 성립 과정은 류큐 왕국이 처한 복합적 현실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대목은 ‘일류동조론(日琉同祖論)’의 기원이다. 흔히 이 논리는 1609년 사쓰마(薩摩) 침공 이후 일본 지배에 영합하기 위해 급조된 주장으로 오해되곤 한다. 그러나 제시된 내용에 따르면, 미나모토노 다메토모(源為朝)가 류큐로 건너와 슌텐(舜天) 왕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전승은 이미 사쓰마 침공 이전부터 류큐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1605년의 류큐신도기(琉球神道記)에 이 내용이 확인된다는 점은, 하네지 쵸슈가 완전히 새로운 허구를 만든 것이 아니라 기존 전승을 국가의 정사(正史)로 끌어올렸음을 보여준다. 즉, 츄잔 세이칸의 일류동조론은 날조라기보다, 이미 퍼져 있던 이야기를 왕국 존속을 위한 정치 언어로 재배치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츄잔 세이칸은 역사서이면서 동시에 체제 방어 문서였다. 일본어(和文) 중심 서술, 일본 연호(元号)의 사용, 그리고 보원물어(保元物語), 평치물어(平治物語), 난포 분시(南浦文之)의 저술 등 일본 측 자료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구성은 이 책이 사쓰마 측 독자를 강하게 의식했음을 드러낸다.
류큐를 막번 체제 안에 무리 없이 위치시키려는 현실주의적 계산이 그 배경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 일류동조론을 곧바로 단순한 친일 사관으로만 읽을 수는 없다는 반론도 제시된다.
타카라 쿠라요시(高良倉吉)의 해석에 따르면, 하네지 쵸슈는 1673년 하네지 시오키(羽地仕置)에서 이 논리를 왕의 종교적 부담을 덜어내기 위한 수사적 논거로 사용했다. 곧, 일본 기원론은 무조건적 숭배가 아니라 제도 개혁을 설득하기 위한 실용적 장치였다는 것이다.
츄잔 세이칸의 더 깊은 정치성은 신화 재편집에서 드러난다. 기존의 류큐신도기나 오모로소시(おもろさうし)에 보이는 류큐의 창세 서사는 아마미키요를 중심으로 하지만, 태양신과의 계보는 분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츄잔 세이칸은 여기에 중국적 신격인 천제(天帝)를 새로 도입했다.
천제의 명을 받은 아마미키요가 섬을 만들고, 천제의 아들로부터 태어난 3남 2녀가 국왕, 제후, 백성, 그리고 최고위 신녀와 일반 무녀의 시조가 되었다는 식의 계보를 명확하게 조직한 것이다. 이 서사는 단순한 신화 정리가 아니었다.
왕권의 신성성을 높이는 동시에, 통치자와 피지배자, 종교 권위자 사이의 위계를 태초의 질서로 고정하는 효과를 낳았다. 다시 말해, 『츄잔 세이칸』은 토착 신화를 손질해 근세적 신분 질서를 합리화한 국가 이데올로기 문서였다.
그러나 이처럼 일본적 색채가 강한 역사서는 대중국 외교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사쓰마는 류큐를 지배했지만, 동시에 중국과의 조공(朝貢) 및 무역 체제를 유지해 이익을 얻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 류큐는 겉으로 보기에 일본과 무관한 독립 왕국처럼 보여야 했다. 이른바 이화정책(異化政策)이 작동한 것이다.
일본어와 일본 연호로 채워진 츄잔 세이칸은 이런 외교 무대에 내놓기 어려웠다. 그래서 1701년, 구메무라(久米村) 출신의 사이타쿠(蔡鐸, 채탁)에게 명하여 이를 한문본으로 번역·개정한 츄잔 세이후가 탄생하게 된다.
여기서 제목 변화는 매우 상징적이다. ‘세감(世鑑)’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뜻을 품지만, ‘세보(世譜)’는 국왕 가문의 계보, 곧 족보적 성격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 변화는 단순한 명칭 수정이 아니라, 중국 황제로부터 인정받아야 하는 류큐 왕가의 공식 계보 문서로 역사서를 재정의한 조치였다.
결국 츄잔 세이칸에서 츄잔 세이후로의 개편은, 내부적으로는 일본과의 연속성을 활용하고 외부적으로는 중국식 형식을 채택해야 했던 류큐 왕국의 이중 전략을 보여준다.
결국 이 두 역사서는 서로 다른 독자를 향한 정치 언어였다. 츄잔 세이칸이 사쓰마 지배 아래 왕국 체제의 재정비와 신분 질서 확립을 위한 내부용 방패였다면, 『츄잔 세이후』는 중국과의 외교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외부용 얼굴이었다. 류큐 왕국은 역사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역사를 다시 구성했던 것이다.
츄잔 세이칸과 츄잔 세이후의 관계는 류큐 왕국이 어떤 방식으로 역사를 정치화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사쓰마(薩摩) 지배를 견디기 위해 일본과의 기원을 강조하고, 동시에 중국과의 외교를 유지하기 위해 그 서술 형식을 중국식으로 바꾸는 과정은 류큐의 처절한 줄타기였다.
결국 류큐의 역사서는 과거를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현재를 버티고 미래를 연장하기 위한 전략 문서였다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