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漢儒學] 격파(擊破)의 수사학

축구라는 유희, 전쟁이라는 야만

춘추시대의 병가(兵家) 손자는 『손자병법』에서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다(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라고 했다. 그러나 인류는 본능적으로 뜨거운 격돌을 갈구해 왔고, 그 파괴적 에너지를 문명적인 유희로 치환해낸 정교한 장치가 바로 축구다.

 

전장의 언어를 빌려온 ‘90분의 대리전’

 

어제 K리그 제주와 부천의 경기를 지켜보며, 축구가 얼마나 철저히 전쟁의 형식을 계승하고 있는지 실감했다. 우리는 승리한 팀이 상대 팀을 ‘격파(擊破)’했다고 말하며, 골문이 열리는 것을 ‘함락(陷落)’이라 부른다. 최전방 공격수는 상대 진영을 ‘폭격’하고, 수비수는 ‘후방’을 사수하며 보급로를 차단하듯 패스 길을 끊는다.

 

경기장 한쪽, 제주 응원단이 내건 “관광이나 하다 갑써”라는 플랭카드는 이 전쟁의 백미인 ‘심리전 내지 홍보전’을 보여준다. 이는 고구려의 을지문덕이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이미 공이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돌아가라(知足願云止)”며 보냈던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의 현대적 변용이다. 물리적인 충돌 이전에 상대의 기를 꺾고 평정심을 흔드는 치밀한 상징적 공격인 셈이다.

 

스포츠, ‘싸우되 공존하는’ 문명의 약속

 

축구가 단순한 싸움과 결정적으로 결을 달리하는 지점은, 그 승패의 기록보다 그라운드를 채우는 선수들의 정직한 헌신에 있다. 90분 내내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 공을 쫓는 행위는, 상대를 파괴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승리라는 목표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과정이다. 

 

전쟁 용어인 ‘격파’가 스포츠에서 비난받지 않고 찬란하게 빛나는 이유는, 그것이 타인의 파멸이 아니라 ‘나의 한계를 넘어선 성취’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독일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통찰처럼, 인류는 공격성을 제거하는 대신 더 안전한 형식으로 옮겨왔다. 축구는 종료 휘슬과 함께 평화로 회귀하며, 패배조차 다음 도약을 위한 자양분이 된다.

 

현실의 전장에서 마주하는 비극적 진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경기장 밖, 지금의 국제 정세를 바라보면 ‘문명’이라는 단어는 무색해진다. 현재 트럼프의 미국과 네타냐후의 이스라엘은 이란을 향해 전 세계를 도탄에 빠뜨리는 야만적인 전쟁을 치르고 있다. 스포츠에서의 ‘격파’가 환호의 대상이라면, 현실의 전장에서 벌어지는 ‘격파’는 무고한 생명의 절멸이자 인류 문명의 퇴보다.

 

이스라엘의 공격에 맞서 이란이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 본토와 주변국의 미국 시설을 타격하며 응수하는 이 비극적인 연쇄 속에는 스포츠가 가진 ‘종료 휘슬’도, ‘서로를 향한 존중’도 존재하지 않는다. 스포츠가 전쟁의 문명적 승화라면, 지금 중동에서 벌어지는 참상은 문명의 옷을 입고 행해지는 가장 노골적인 야만이다.

 

맺으며

 

우리는 왜 경기장에서 이토록 뜨겁게 싸우는가. 그것은 우리가 ‘싸우되 죽이지 않는 지혜’를 실천하고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현실의 전쟁은 여전히 힘의 논리에 의해 누군가를 진정으로 파괴하려 든다. 

 

제주가 부천을 1대 0으로 격파한 뒤 서로의 등을 두드려주던 그 평화로운 장면이, 총성이 빗발치는 중동의 전장에도 닿기를 간절히 바란다. 상대를 이겨야만 만족하는 광기를 멈추고, 함께 공존하는 것 자체가 승리임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인류는 경기장 밖에서도 진짜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 Gemini 제작
작성 2026.04.05 22:08 수정 2026.04.05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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