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공정책신문=김유리 기자] (편집자주) 박동명 법학박사는 선진사회정책연구원장으로서 서울특별시의회 전문위원, 서울특별시 공익감사위원, 강남구 결산검사위원 등을 역임한 지방재정·의정활동 전문가이다. 지방의회의 예산·결산 심사, 행정사무감사, 조례입법, 복지재정 분석 분야에서 풍부한 현장 경험과 정책 연구를 축적해 왔으며, 현재 국회의정연수원과 행정안전부 지방자치인재개발원 등에서 지방의회 재정통제와 의정혁신을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 재정은 분명한 경고등 앞에 서 있다. 중동 전쟁 장기화, 국제유가 불안, 원·달러 환율 상승, 고금리의 지속이 겹치면서 한국 경제는 다시 ‘3고’ 충격의 복판으로 들어가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성장률은 둔화되는데 물가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 스태그플레이션 위험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럴 때일수록 정부 재정은 냉정하고 정교해야 한다. 그러나 최근 정부의 대응을 보면 원칙과 전략보다는 급한 불을 끄는 임시방편, 그리고 그 위에 덧씌워진 정치적 계산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
정부는 2026년 3월 31일 중동 전쟁 대응 명목으로 26조2천억원 규모의 재정 패키지를 발표하고, 이 가운데 총지출 기준 25조2천억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동시에 정부는 2026년 3월 한 달 동안 한국은행에서 17조원을 일시 차입하였고, 그중 13조3천억원을 월말까지 상환하지 못해 약 77억원의 이자를 부담하게 되었다. 본래 한국은행 일시차입은 세입과 세출의 시간차를 메우기 위한 응급성 장치에 가깝다. 그런데 그것이 반복되고 규모까지 커진다면, 이는 단순한 회계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국고 운영이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신호로 읽어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이 부담이 중앙정부 안에서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추경이든, 한은 차입이든, 결국 그 후속 비용은 지방교부세 조정, 국고보조사업 구조 변경, 지방비 매칭 확대, 지방채 증가 등 다양한 형태로 지방재정에 스며든다. 중앙정부의 재정 불안이 지방정부의 재정 압박으로 조용히 이전되는 구조가 작동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문제는 정쟁의 소음 속에 가려진 채 충분히 토론되지 못하고 있다. 현금 지원을 더 할 것인가, 선별 지원을 할 것인가를 둘러싼 정치적 공방은 요란하지만, 정작 중요한 질문인 “그 비용은 누가 부담하는가”, “그 재정 구조는 얼마나 지속 가능한가”, “지방은 이를 감당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이번 추경안 분석에서 고유가 피해지원금 등 일부 사업이 소비자 부담 완화에 초점을 두고 있어 재정 부담을 키울 수 있으며, 지방비 매칭 구조가 재정력이 취약한 지방자치단체에 역설적으로 더 큰 부담을 줄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특히 지역별 지원 단가와 보조율 구조를 보면,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방일수록 더 많은 지방비를 떠안는 모순이 생길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재정이 가장 약한 지역에게 더 무거운 짐을 지우는 방식이다. 이것은 정책이 아니라 전가이다. 이것은 균형이 아니라 왜곡이다.
지방재정의 본질은 단순한 회계가 아니다. 지방재정은 주민의 삶을 지탱하는 마지막 공공 안전망이자, 지역의 미래를 설계하는 가장 현실적인 수단이다. 복지, 돌봄, 교통, 환경, 교육, 지역경제, 사회안전망은 모두 지방재정 위에서 작동한다. 그런데 중앙정부가 위기 때마다 정치적으로 보기 좋은 지원책을 앞세우고, 그 이면의 재정 부담을 지방으로 넘기는 방식이 반복된다면 지방자치는 껍데기만 남게 된다. 예산은 중앙에서 결정하고, 부담은 지방이 지고, 책임은 누구도 지지 않는 구조가 고착된다면 그것은 재정 민주주의의 실패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러한 재정 운영이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까지 흐리게 만든다는 점이다. 한은 차입은 결국 비용을 낳고, 추경은 채무와 이자 부담을 키우며, 지방비 매칭은 지역의 자체 사업 여력을 잠식한다. 오늘의 정치를 위해 미래의 재정을 끌어다 쓰는 일은 가장 손쉬운 선택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의 용기가 아니라 정치의 무책임이다. 지금 세대가 감당해야 할 비용을 미래세대에게 떠넘기면서도 그것을 민생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은 정직한 재정이라고 할 수 없다.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에서 지방재정은 평시와 전혀 다른 기준으로 운용되어야 한다.
첫째, 재정건전성과 지속가능성을 최우선 원칙으로 세워야 한다. 지방재정법과 관련 제도는 이미 건전재정과 중기재정계획의 중요성을 제도화하고 있다. 중기지방재정계획은 단년도 예산이 아니라 장래 재정 여건과 통합재정수지 전망, 분야별 투자 방향까지 포함하는 장치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기 인기예산이 아니라, 향후 3년과 5년 뒤에도 버틸 수 있는 예산이다.
둘째, 보편적 확산이 아니라 취약계층과 취약지역에 대한 표적 집중이 필요하다. 고유가와 고환율의 충격은 모든 국민에게 동일하지 않다. 에너지 비용에 민감한 저소득층, 교통비 부담이 큰 주민, 금리 상승에 취약한 자영업자, 수입 원자재 의존도가 높은 지역 산업이 먼저 흔들린다. 그렇다면 재정은 가장 아픈 곳에 가장 먼저 닿아야 한다. 그러나 표적 지원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상시적 현금 배분 체계로 굳어져서는 안 된다. 시한이 있어야 하고, 성과 평가가 있어야 하며, 출구 전략이 있어야 한다. 지원이 필요할 때는 과감해야 하지만, 제도가 중독성을 띠는 순간 재정은 스스로를 갉아먹기 시작한다.
셋째, 지방재정은 단순한 소비보전이 아니라 구조개혁의 촉매가 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국제유가와 환율에 경제 전체가 흔들릴 때 지방정부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돈을 푸는 것이 아니다. 공공건축물의 에너지 효율 개선, 노후 시설의 그린리모델링, 지역 단위 분산형 에너지 체계, 스마트 교통 인프라, 공공서비스 디지털 전환 등에 대한 전략적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 이것은 환경정책도 되고, 산업정책도 되며, 재정건전성 정책도 된다. 에너지 비용 구조를 낮추고 지역 일자리를 늘리며 중장기적으로 지방재정의 지출 압박을 줄이는 길이기 때문이다. 위기 때 돈을 어디에 쓰느냐가 곧 그 사회의 방향을 말해 준다.
넷째, 지방재정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투명성이다. 추경이든 지방채든 기금 활용이든, 그 비용과 효과는 주민에게 명료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어느 사업에 얼마를 쓰는지뿐만 아니라, 그 사업이 앞으로 몇 년간 어떤 운영비를 낳고 어떤 채무 부담을 만들며, 그 부담이 어느 세대에게 돌아가는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 재정 논의는 너무 자주 ‘얼마를 더 쓸 것인가’에만 머물렀다. 그러나 진정한 민주주의적 재정 질문은 ‘그 돈을 누가 부담하는가’, ‘그 지출이 장래에 어떤 책임을 남기는가’여야 한다.
이제 지방정부와 지방의회는 중앙정치의 논리에 끌려다녀서는 안 된다.
오히려 역으로 중앙정부에 분명히 요구해야 한다.
첫째, 국고보조사업의 지방비 매칭 구조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특히 인구감소지역, 재정자립도가 낮은 기초지자체, 산업기반이 약한 지역에는 국고보조율을 높이고 지방비 부담 상한을 설정해야 한다. 위기일수록 어려운 지역에 더 많은 지원이 가야지, 더 큰 부담이 가서는 안 된다. 둘째, 지방재정에 중장기 충격을 주는 추경 사업은 지방정부와 지방의회의 사전 의견수렴 절차를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 중앙정부가 설계하고 지방이 비용을 대는 방식은 결코 책임 있는 국가 운영이라 할 수 없다. 셋째, 지방정부는 자체적으로 스태그플레이션 대응형 재정 매뉴얼을 만들어야 한다. 세입 감소, 이자 비용 증가, 복지수요 급증, 투자사업 조정 기준을 미리 설정하고, 위기 때 자동으로 발동되는 지출 구조조정 원칙을 조례나 의회 의결로 제도화해야 한다.
무엇보다 지방의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지방의회는 더 이상 예산 증감의 숫자만 따지는 기관이어서는 안 된다. 행정사무감사와 예산심의에서 반드시 물어야 한다. 이 사업은 일회성 현금 배분에 그치는가, 아니면 지역 구조를 바꾸는가. 이 지출은 올해 주민의 체감만 높이는가, 아니면 내년과 후년의 채무 부담을 키우는가. 이 매칭 사업은 중앙의 정치논리를 지역에 떠넘기는 것인가, 아니면 지역에 실질적 이익을 주는가. 스태그플레이션 시대의 의정활동은 결국 이러한 질문의 수준에서 결정된다.
중앙정부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지방재정은 남는 돈으로 메우는 보조 수단이 아니다. 국가 재정의 불안을 감추기 위해 지방을 완충지대로 삼는 방식은 이제 중단되어야 한다. 정부가 세입·세출 관리에 실패하고, 이를 한국은행 차입으로 메우며, 추경으로 단기적 정치 효과를 노리고, 그 뒤의 부담을 지방비 매칭과 후속 구조조정으로 넘기는 일이 반복된다면, 지방자치는 제도만 남고 내용은 사라지게 된다. 한은 차입의 상시화는 재정규율의 해이이고, 전쟁 추경의 정치화는 정책의 단기화를 낳으며, 지방비 전가는 결국 지역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지금은 재정의 철학을 다시 세워야 할 시점이다. 위기 때일수록 국가와 지방은 무엇을 지킬 것인지, 무엇을 줄일 것인지, 무엇에 투자할 것인지 분명해야 한다. 민생은 지켜야 한다. 그러나 미래를 팔아 오늘의 박수를 사서는 안 된다. 취약계층은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구조를 바꾸지 못하는 지출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지역경제를 살려야 한다. 그러나 지방을 중앙정치의 계산서 정리 창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스태그플레이션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인기영합적 재정이 아니라 원칙 있는 재정이다. 보여 주기식 추경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재정질서이다. 지방의 침묵을 전제로 한 중앙의 편의주의가 아니라, 지방의 목소리와 주민의 알 권리를 바탕으로 한 재정 민주주의이다. 이제 지방정부와 지방의회는 분명히 말해야 한다. 중앙정부의 재정 불안과 정치적 계산 때문에 지방재정을 희생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오늘의 위기를 빌미로 내일의 지역을 담보 잡아서는 안 된다고. 그것이야말로 지방자치를 지키는 길이며, 동시에 미래세대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다.
▷법학박사, 선진사회정책연구원 원장
▷한국정책연구원 원장
▷(사)한국공공정책학회 부회장, 상임이사
▷(전)국민대학교 행정대학원 외래교수
▷(전)서울특별시의회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