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여 문화살롱] 폐공장에서 피어난 색채의 기적

팔복예술공장에서 만난 마르크 샤갈

전주시 덕진구 팔복동, 이팝나무 길 끝자락에 녹슨 굴뚝 하나가 외로이 서 있습니다. 희미하게 남은 '쏘렉스'라는 글자는 이곳이 과거 카세트테이프를 생산하던 뜨거운 노동의 현장이었음을 증명합니다. 1979년 문을 연 이 공장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1991년 가동을 멈췄고, 25년간 침묵 속에 방치되었습니다.

                                                     팔복예술공장 전시장 입구                      사진 / 이정우

 

하지만 2018년, 이곳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습니다. 공장을 허물고 새로 짓는 대신, 시간의 흔적이 묻은 벽체와 기둥을 보존하며 예술을 생산하는 '팔복예술공장'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과거의 노동과 현재의 창작이 공존하는 이 특별한 공간에, 지금 '색채의 마술사' 마르크 샤갈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1. 공장 위에 내려앉은 색채의 시(詩)

전주문화재단은 설립 20주년과 한-프랑스 수교 140주년을 기념하여 '마르크 샤갈전'을 개최합니다. 이번 전시는 국내에서 열린 샤갈 관련 전시 중 손꼽히는 규모로, 오리지널 판화와 유화, 드로잉 등 350여 점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전시는 총 6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샤갈의 예술 여정을 입체적으로 조명합니다.

 

  •     주요 섹션: '사랑을 노래하다', '환상의 세계에서', '파리, 파리, 파리', '신에게 다가가다', '빛과 색채', '영원한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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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익숙한 현실은 경계를 잃고 흐려집니다. 하늘을 유영하는 연인들, 지붕 위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연주자, 사람과 동물이 어우러진 비현실적인 장면들은 샤갈에게 있어 현실보다 더 진실한 '마음의 풍경'입니다.

 

2. 이해하는 미술이 아닌, 느끼는 예술

현대미술을 어렵게 느끼는 이들에게도 샤갈은 다정한 화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머리로 분석하기보다 마음으로 먼저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예술은 사랑의 표현이다"라고 말했던 그의 철학처럼, 관람객들은 사랑하는 이와의 추억이나 어린 시절의 기억 한 조각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작품과 깊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번 전시는 작가가 직접 제작에 참여한 오리지널 판화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그 가치가 높습니다. 일반적인 판화가 3~5개의 색 판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샤갈은 20~30개의 판을 겹쳐 찍으며 유화에 버금가는 깊고 풍부한 색채를 구현했습니다. 그가 왜 '색채의 마술사'라 불리는지 육안으로 확인할 소중한 기회입니다.

                                                           도슨트와 만나는 유익한 시간                            사진 / 이정우

 

3. '이방인'이 건네는 따뜻한 위로

샤갈의 삶은 차별과 전쟁, 망명으로 점철된 고달픈 이방인의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캔버스는 따뜻한 희망으로 가득합니다. 그는 중력을 거슬러 하늘을 나는 인물들을 통해 가혹한 현실을 견디고 극복하는 방식을 제안합니다.

 

전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영원한 이방인' 섹션은 고독 속에서도 사랑과 희망을 놓지 않았던 거장의 내면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합니다.

 

4. 공간과 예술이 나누는 대화

이번 전시의 진정한 묘미는 팔복예술공장이라는 '장소성'에 있습니다. 산업 시대 노동의 기억을 간직한 거친 공장의 벽면과, 인간의 가장 섬세한 감정을 담아낸 샤갈의 작품이 만날 때 묘한 울림이 발생합니다.

 

잊힌 장소를 복원하여 미래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팔복예술공장의 본질은, 흩어진 기억을 모아 예술로 승화시킨 샤갈의 작업 방식과 닮아 있습니다. 이 공장을 찾아가야 할 이유는 샤갈이라는 거장을 보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공간과 예술이 서로를 완성하는 특별한 순간을 경험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전시는 6월 21일까지. 봄이 끝나기 전에, 이 공장을 찾아갈 이유는 충분합니다.

                                                    제2전시장으로 가는 길                                 사진 / 이정우
작성 2026.04.04 11:07 수정 2026.04.05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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