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사물 안에 머문 시간의 겹을 천천히 펼쳐 보이는 작가가 있다. The Imaginary Pocus가 [창간특집기획연재] 아티스트 아카이브 시리즈로 만난 스무 번째 주인공은 ‘시간의 흔적을 사랑한 아티스트’ 조수현 작가이다.
오랜 기간 그림책의 페이지 사이사이에 소소한 일상의 온기를 불어넣던 그녀는, 이제 캔버스 위에서 물감을 중첩하고 벗겨내는 반복의 과정을 통해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낡은 사물들의 숨겨진 결을 시각화하는 회화 작가로 깊이 있는 행보를 걷고 있다.

매체를 넘어선 진정성, ‘과정에 깃든 사유’
조수현 작가가 정의하는 예술의 본질은 결과물의 표면적 완성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녀는 "진정한 예술성은 매체가 아날로그인지 디지털인지에 관계없이, 작가의 의도가 작업의 전 과정에 얼마나 깊이 개입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라며 확고한 신념을 밝힌다. 어떤 감각과 질문에서 출발해 그것을 화면에 어떤 방식으로 남겼는지가 예술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아크릴 물감을 거듭 덧칠하고 다시 벗겨내는 육체적 노동은 단순한 채색 행위를 넘어 그 자체로 시간에 대한 끈질긴 사유를 동반한다. 사물의 외형을 복제하는 것을 넘어 그 안에 축적된 시간과 기억의 방식을 시각적으로 진솔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이 정교한 과정이 그녀의 작품 세계를 지탱하는 가장 명확한 철학이다.
‘사물에 남은 시간을 그리는 작가’의 다층적 시선
스스로의 정체성을 ‘사물에 남은 시간을 그리는 작가’로 명명하는 그녀의 세계관은 우연히 들른 중고서점에서 시작되었다. 누군가의 손때가 묻고 켜켜이 쌓인 낡은 책 더미는 그녀에게 단순한 풍경이 아닌 시간의 축적으로 다가왔다. 그곳에는 누군가의 시간이 켜처럼 쌓여 있었지만, 동시에 쉽게 잊히고 스러지는 감각도 공존하고 있었다.
이 장면을 보며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된 작가는, 사물을 완결된 형태로만 보던 이전의 시선에서 벗어나 닳은 표면과 반복된 사용의 흔적을 먼저 포착하게 되었다. 작가는 화면 속에서 서로 다른 속도를 가진 사물들이 공존하듯 우리의 삶 역시 다채로운 시간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바라본다. 그녀의 세계에서 일상의 사물은 누군가의 기억이 겹쳐지고 끊임없이 생동하는 매개체로 작동한다.
축적되고 스러지는 시간, ‘기억의 재구성’
조수현 작가의 캔버스 위에서 사물은 개인의 경험과 감정이 다층적으로 겹쳐진 유동적인 상태로 존재한다. 화면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책’은 지식의 상징이라는 보편적 의미를 탈피해, 시간이 쌓이고 머물렀던 개인적 경험의 축적물로서 기능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오랜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낡은 책 곁에 찰나의 순간을 찬란하게 머물다 사라지는 꽃이나 빠르게 소모되는 향수 등 전혀 다른 속도를 지닌 오브제들을 병치한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한 화면 안에서 이질적인 시간의 감각들이 교차하게 된다. 넘쳐나는 빠른 이미지의 시대 속에서 그녀의 작업은 관객으로 하여금 평범한 대상들에 깃든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천천히 마주할 수 있는 사유의 공간을 제안한다.
‘쌓음과 벗겨냄’이 빚어내는 캔버스의 리듬
작가의 캔버스는 단 한 번의 붓질로 완성되지 않는다. 마르면 물에 다시 녹지 않는 아크릴 물감 고유의 물성을 활용해 수없이 덧칠하고 다시 벗겨내는 행위를 반복하며 시간의 층을 축적한다. 이 과정에서 밑색이 어디까지 드러날지 예측할 수 없는 우연성이 개입하게 되는데, 작가는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화면에 날것의 생동감을 부여한다.
그녀는 "형태와 색, 흔적들이 서로 어긋나지 않고 맞물릴 때, 화면과 제가 같은 리듬 안에 들어와 있다는 감각을 경험합니다"라고 고백한다. 기억과 감정이 자로 잰 듯 정돈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듯, 화면 곳곳에 의도적인 흩어짐과 미묘한 어긋남을 남겨두어 통제와 우연 사이의 긴장을 자아내는 것이 그녀만의 회화 문법이다.


일러스트의 온기에서 회화의 밀도로, ‘외연의 확장’
‘일루몽’이라는 필명으로 그림책과 일러스트 작업을 하던 시절, 그녀는 일상 속 작고 아름다운 순간들을 포착해 따뜻한 감정을 그려왔다. 하지만 ‘하나의 장면 안에 더 많은 시간과 감정을 담고 싶다’는 내면의 갈증은 그녀를 순수 회화의 영역으로 이끌었다. 무한한 수정이 가능했던 디지털 매체를 내려놓고 캔버스 앞에서의 직관적인 붓질을 마주하며 겪은 치열한 시행착오는 지금의 회화적 밀도를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개인 작업이 내면의 시선을 축적하는 과정이라면, 브랜드와의 협업은 그녀의 언어가 외부로 확장되는 무대다. 국가유산진흥원과 웅진식품의 K-Heritage 에디션 콜라보레이션, 스타필드 설 시즌 키비주얼, 한국해양진흥공사 캘린더 작업 등을 통해 폭넓은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서울아트쇼, 어반브레이크, 일본 후쿠오카 AFAF 등 유수의 아트페어 현장에서 작품을 마주한 관람객들이 전한 "따뜻하다", "편안하다"는 반응은 작가에게 자신의 방향성을 확신하는 동력이 되었다.
2026년 봄, 갤러리에서 마주하는 ‘사물의 진화’
이 특별한 아트 브랜딩 실험이 막을 내린 직후, 2026년 4월 6일부터 18일까지 서울 강서구 비커밍 갤러리에서는 작가의 두 번째 개인전 <일상의 밀도, 사소함의 결>이 성대하게 개최된다. 이번 전시는 2024년 첫 개인전 이후 작가가 이뤄낸 예술적 진화를 투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리다. 첫 개인전이 사물의 형태와 상징성을 중심으로 장면을 구축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형식에서 한결 벗어나 유동적이고 자유로운 시선으로 사물을 다루는 깊이를 보여준다.
특히 전통 민화의 ‘다시점(여러 시선이 동시에 포착되는 방식)’을 차용해 대상에 대한 다원적 접근을 시도한 “The Radiant Ordinary” 시리즈 전편이 개인전에서는 최초로 온전히 공개된다. 하나의 고정된 시점을 탈피함으로써 화면 속 사물들은 독특한 리듬과 긴장감을 자아내며, 단순한 정물을 넘어 기억과 감정이 스며든 생생한 상태로 재구성된다.
조수현 작가는 갤러리를 찾을 관람객들을 향해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 특정한 의미를 해석하기보다 각자의 기억과 감정을 자연스럽게 투영하며, 익숙한 사물들을 조금 다른 감각으로 경험해 보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전한다.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쉽게 지나치는 사물들 안에도 각자의 시간과 기억이 스며 있음을 느끼는 시간. 이번 전시는 일상이 조금 더 따뜻하고 깊게 느껴지는 평온한 사유의 장이 될 것이다.
시간의 층위를 기록한 세 번의 ‘변곡점’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작가의 예술적 정체성을 가장 선명하게 투영하는 세 점의 대표작은 각기 다른 의미의 변곡점을 지닌다.
The Radiant Ordinary No.1 [2025, 53x45.5cm]: 책과 사물의 구조 안에서 형태의 재현을 뛰어넘어 축적된 시간과 감정을 담아내려는 시도가 처음으로 구체화된 기점이다. 이후 작업의 방향을 형성하는 기준이 되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The Radiant Ordinary No.10 [2025, 50x50cm]: 대상을 정적인 상태로 가두지 않고 서로 다른 시점과 감각을 한 화면에 공존시켰다. 구성 전반에서 겪은 수많은 시행착오가 회화적인 밀도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는 전환점이 되었다.
The Radiant Ordinary No.23 [2026, 90.9x72.7cm]: 사물들을 단순화하고 반복되는 선과 색의 중첩을 통해 시간의 결을 명징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각각의 사물들은 서로 다른 기억의 단면으로 인식되도록 정교하게 재구성되었다.

익숙함을 낯설게 감각하는 ‘시선의 진화’
작가에게 상상의 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거창한 발명에 있지 않다. 그녀는 상상을 두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보다, 익숙한 대상을 다르게 보게 만드는 힘"이라고 명쾌하게 정의한다. 늘 곁에 있는 흔한 사물을 거듭해서 바라보는 과정에서 미세한 감각의 변화를 감지하고, 그 미묘한 틈새에 자연스럽게 상상이 개입하여 예술적 장면으로 승화된다는 것이다.
호흡을 고르며 넓혀가는 ‘사물의 지평’
현재 그녀의 캔버스는 ‘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지만, 앞으로는 책상 위의 오래된 물건들처럼 일상에 오랜 시간 머물러 온 친숙한 대상들로 시선을 확장해 나갈 계획이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고 사용의 흔적이 축적된 사물들을 통해 서로 다른 시간의 감각이 교차하는 장면을 탐구하고자 한다.
다만 이번 비커밍 갤러리 개인전이 끝난 직후에는 캔버스 앞에서의 물리적 속도를 조절할 예정이다. 호흡을 가다듬고 사물과 시간에 대한 시선을 내면 깊숙이 정돈하는 이 사유의 과정은 다음 작업을 더욱 밀도 있게 이끌어줄 밑거름이 될 것이다.
반복이 빚어내는 ‘삶의 예술화’
자신의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을 찾지 못해 헤매는 이들에게, 작가는 소박하고 명확한 해답을 건넨다. 그녀는 "방향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면, 먼저 자신이 계속해서 돌아보게 되는 하나의 대상이나 감각을 발견하고, 그것을 반복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라고 조언한다.
거창한 의미를 찾기보다 하나의 감각을 끈질기게 붙잡고 반복하는 행위 속에서 우리 삶 역시 서서히 예술로 피어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갈무리하며, 무심히 흘려보내는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춰 서게 만드는 그녀의 마지막 한 마디가 마음속에 깊은 여운을 남긴다.
"당신의 시간은, 지금 무엇으로 남아 있습니까?"
[전시 정보]
▪️전시명 : 조수현 개인전 <일상의 밀도, 사소함의 결>
▪️전시기간 : 2026년 4월 6일 ~ 4월 18일
▪️전시장소 : 비커밍 갤러리 (서울 강서구 등촌로39마길 5)
▪️관전 포인트 : ‘The Radiant Ordinary’ 시리즈 전면 공개, 민화의 다시점(여러 시점)을 차용한 오브제의 다층적 재구성

[아티스트 소개: 조수현]
오랜 기간 '일루몽'이라는 필명으로 그림책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했다. 이후 하나의 장면 안에 더 많은 시간과 감정을 담고자 순수 회화로 영역을 확장, 아크릴 물감을 덧칠하고 벗겨내는 반복의 과정을 통해 낡은 사물에 축적된 시간과 기억의 층위를 시각화하고 있다. 2024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026년 비커밍 갤러리 개인전 <일상의 밀도, 사소함의 결>, H.아트브릿지 기획전 《Art to Brand》 등에 참여하며 대중과 활발히 소통 중이다. 또한 국가유산진흥원, 스타필드 등 대형 브랜드와의 협업 및 국내외 유수의 아트페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스스로를 '사물에 남은 시간을 그리는 작가'로 명명하며 무심한 일상 속 미세한 감각의 변화를 일깨우는 예술적 사유의 공간을 제안하고 있다.
[The Pocus Archive: 아티스트 아카이브 – OO을 사랑한 아티스트]
AI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가치는 결국 인간의 마음과 상상의 힘에 있다. 본지 The Imaginary Pocus는 창간을 맞이하여 기술만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감성과 상상 세계를 지켜가는 예술가들을 조명하는 연재 시리즈 [OO을 사랑한 아티스트]를 선보인다. The Pocus Archive는 앞으로도 자신만의 가치를 사랑하며 자신의 원하는 미래를 실현하는 아티스트들을 엄선하여 기록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