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크린만 문지르는 현대인, 왜 무언가를 직접 만들고 싶어 할까?
하루 종일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고 스마트폰 스크린을 문지르다 퇴근하는 길, 문득 가슴 한구석이 헛헛해지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편리한 첨단 기술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불안과 무기력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은 증가하고 있다. 영국의 교육학자 존 애벗(John Abbott)은 현대 사회의 이러한 '하이테크 포화 상태(high tech saturation)'가 우리에게서 여유와 배려의 시간을 앗아간다고 경고했다.
현대인들은 과거 세대와 달리 기본적 수공구인 톱이나 망치조차 제대로 쥐어본 적 없는 경우가 많다. 그저 돈을 주고 완성된 공산품을 소비하는 데 익숙해진 우리는 스스로 무언가를 수리하거나 창조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기술의 발전이 우리를 편안하게 해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의 물건과 환경에 대해 점점 더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존재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뚜렷한 실체가 없는 디지털 업무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본능적으로 흙이나 나무 같은 자연의 소재를 손으로 만지고 조물거리며 무언가를 짓고 싶어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진화의 마스터키 : 손이 뇌를 만들고 도구가 인간을 완성하다
기원전 500년경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낙사고라스(Anaxagoras)는 "인간은 손이 있기 때문에 가장 지혜로운 동물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수천 년 전의 이 통찰은 현대 신경과학을 통해 놀라운 사실로 증명되고 있다.
신경과학의 권위자인 프랭크 윌슨(Frank Wilson) 박사는 인류의 뇌 발달이 손의 진화, 특히 도구를 쥐는 손의 능력과 직결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초기 인류가 엄지손가락을 이용해 도구를 쥐고 나무나 돌을 가공하기 시작하면서 뇌의 재구성이 일어났고 이것이 훗날 인간 특유의 인지 능력과 언어 능력 발달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즉 도구와 재료를 조작하여 무언가를 창조하는 행위는 인간의 유전적 기저에 깊이 각인된 본능이다.
윌슨 박사는 우리가 손을 사용하여 어떤 기술을 연마하고 몰입할 때 단순한 신체적 움직임을 넘어 생각과 감정이 융합되는 강력한 '정서적 충전(emotional charge)'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복잡한 손놀림을 요구하는 목공예에 깊이 집중하다 보면 뇌는 일상의 억눌린 긴장을 해소하고 엉켜있던 문제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실험적 사고를 시작하게 된다. 반면 오늘날 화면과 키보드만 두드리는 삶은 인류가 수백만 년에 걸쳐 진화시켜 온 손의 섬세한 능력과 그에 수반되는 인지적 만족감을 잃게 만들고 있다.
나무와 손의 조우, 상처를 다듬고 자존감을 깎아 올리는 치유의 시간
왜 하필 '나무'이고 '목공'일까요? 나무는 살아 숨 쉬던 생명체로서 고유의 결과 향기, 따뜻한 촉감을 지니고 있다. 거친 나무 표면을 대패와 칼로 다듬고 깎아내는 과정은 정성과 헌신을 요구한다. 조각칼을 갈고 나무를 자르는 행위 자체가 세상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삶에 구체적인 뿌리를 내려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를 '포이에인(poiein)'이라 부르며 이를 인간 내면의 신성함과 연결 지었다. 서툰 솜씨로 깎아낸 투박한 나무 숟가락 하나라도 그것은 내 영혼의 이미지이자 나의 애정과 창의성이 깃든 결과물이다.
무기력함이나 깊은 슬픔에 빠져 있을 때 나무 조각을 들고 내 손으로 직접 깎고 다듬는 행위는 놀랍게도 그 상실감을 깊은 성취감과 만족감으로 바꾸어 준다.
목공실에서 톱밥을 뒤집어쓰고 나무의 결을 읽어내는 시간은 그저 취미 생활이 아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손의 지능'을 되찾는 일이며 완벽하게 통제된 디지털 세상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땀방울과 인간적인 흠집이 허용되는 치유의 과정이다.
나무를 깎으며 우리는 결코 멈추지 않는 현대 사회의 속도에서 벗어나 내면의 속도를 되찾고 무너진 자존감을 튼튼하게 다시 세울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