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 뉴스를 10여 분 보다가 슬며시 텔레비전을 끄고 책을 가지러 일어납니다.
“피곤한데 그냥 쉬지, 뭐하러 일어나니?”
엄마의 빈말이 투명하게 들립니다.
오늘은 시집을 챙겨 다시 엄마 옆에 앉습니다.
‘엄마가 시를 좋아할까? 짧게 압축된 시의 행간을 읽어내실까?’ 하는 우려도 없지 않았습니다.
잠깐의 궁리 끝에 구어체로 시를 읽습니다.
“그렇지, 그렇지.” 하며 추임새를 넣어 주는 엄마를 보며 안도합니다.
그리고 엄마의 리액션이 좋은 싯구는 익살스러운 목소리로 다시 읽습니다.
이정록 시인의 시집 <어머니 학교>에 실린 “짐”이란 시의 한 구절입니다.
“기사양반 / 이걸 어쩐다? / 정거장에 짐 보따릴 놓고 탔네 /
걱정 마유 / 보기엔 노각 같아도 이 버스가 후진 전문이유 / 담부턴 지발, 짐부터 실으셔유 /
그러니까 나부터 타는 겨 / 나만 한 짐짝이 어디 또 있간디?”
엄마는 연신 무릎을 치며 웃습니다.
“그래 맞다, 맞어. 늙으면 짐짝이 되는 거지”
“시라는 게 참 웃기고 재밌네. 시인이라는 사람도 그렇고 말이야”
이번에는 같은 시집에 있는 “머리 경작”의 일부입니다.
“공부도 농사도 때가 있어 / 콧구멍에 풋고추 들이밀어서 안 들어가면 / 그해 모내기는 끝난 거여.”
저는 이 뜻을 잘 몰랐는데, 엄마는 단박에 이해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어린 풋고추는 모를까, 다 큰 풋고추를 콧구멍에 넣으면 들어갈 리가 없지.
그러니까 때를 놓치면 힘들다는 거지.”
“시 깜냥이 어깨너머에 납작하니 숨어 있다가 / 어느 날 너를 엄마! 하고 부를 때까지
/ 그냥 모르쇠하며 같이 사는 겨 / 세쌍둥이 네쌍둥이 한꺼번에 둘러업고
/ 젖 준 놈 또 주고 굶긴 놈 또 굶기지 말고.”
엄마는 이정록 시인의 “시”의 뒷부분에서는 잇몸을 드러내며 글자 그대로 박장대소를 하십니다.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세 번 네 번 거듭 읽습니다.
그때마다 엄마는 소녀처럼 고개를 젖히고 웃습니다.
엄마 얼굴의 깊은 주름살이 펴질 때마다 행복이 밀려 나왔습니다.
당신의 첫 손자를 볼 때도 이러셨을까? 싶었습니다.
용돈도 아니고 선물도 아닌, 그저 시 한 구절로 이렇게 허물없이 모자가 만나고 웃을 수 있는 게 여간 신기한 게 아닙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이기까지 합니다.
오늘은 인생에서 큰일을 해냈습니다.
K People Focus 김황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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