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초의눈] 달러 패권 균열의 시작

기축통화는 어떻게 흔들리는가

페트로달러: 에너지와 결합된 권력

세계 질서가 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돈'이 있다.

 

돈은 단순한 교환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 기술, 권력, 그리고 신뢰가 응축된 결과물이다. 잉여 생산의 확대, 노동과 토지의 생산성 향상, 과학기술의 발전은 시장을 키웠고, 시장은 더 정교한 '가치의 측정 도구'를 요구했다. 그 결과가 바로 화폐의 진화다. 이 관점에서 보면 달러는 자연스럽게 등장한 통화가 아니라, 역사적 조건과 권력 구조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이미지 Gemini 제작

 

1. 달러의 탄생: 신뢰의 제도화

미국 달러의 기원은 17세기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690년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지폐 발행은 단순한 재정 조달 수단이었지만, 화폐가 국가 권력과 결합하는 출발점이었다. 이후 18세기 달러 기호의 도입, 1913년 연방준비제도의 설립을 거치며 달러는 점차 국가 신용을 기반으로 한 화폐로 자리 잡는다.

 

초기의 달러는 금과 연결되어 있었다. 금 본위제는 화폐의 가치를 물리적 실체에 묶어 두는 장치였고, 이는 곧 신뢰의 제도화였다. 달러를 들고 가면 언제든 금으로 바꿀 수 있다는 약속, 이 단순한 약속이 국제 금융 질서를 지탱했다.

 

2. 브레튼우즈 체제: 달러 패권의 설계

1944년 브레튼우즈 협정은 달러를 세계 경제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금 1온스를 35달러로 고정하고 각국 통화를 달러에 연동시킨 이 체제는 사실상 "달러 = 세계 화폐"라는 공식을 만든 사건이었다. 이 시점부터 달러는 단순한 국가 통화를 넘어 하나의 '질서' 그 자체가 된다.

 

그러나 이 질서는 오래가지 못했다. 1971년, 미국은 금 태환을 중단한다. 이른바 '닉슨 쇼크'다. 금과의 연결이 끊어진 순간, 달러는 더 이상 물리적 가치에 묶인 화폐가 아니라 순수한 '신용'의 산물이 되었다.

 

3. 페트로달러: 에너지와 결합된 권력

금의 족쇄에서 벗어난 달러는 새로운 기반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석유였다. 1974년,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협력을 통해 원유 거래를 달러로 결제하는 구조를 구축했고, 이로써 '페트로달러 시스템'이 탄생했다.

 

이 구조는 매우 정교하고 자기 강화적이다. 세계가 석유를 사기 위해 달러를 필요로 하고, 달러를 확보하기 위해 미국 국채를 사며, 이는 다시 미국의 재정과 금융 시스템을 지탱한다. 즉, 달러 패권은 단순한 통화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군사·금융이 결합된 복합 권력 구조다.

 

한 가지 짚어둘 점이 있다. 2024년을 전후해 "사우디아라비아가 50년 만기 페트로달러 협정을 공식 종료했다"는 주장이 확산됐다. 사실 여부를 떠나 중요한 것은 조약의 유무가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BRICS 가입, 위안화 기반 결제 실험(mBridge 프로젝트), 중국과의 무역 확대 등을 통해 실질적인 통화 다변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조는 흔들리지 않았지만, 방향은 분명히 바뀌고 있다.

 

4. 보이지 않는 특권: 시뇨리지와 제국의 책임

기축통화국 미국은 특별한 권리를 누린다.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하고, 자국 통화로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이른바 '시뇨리지(Seigniorage) 효과'다. 프랑스의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1960년대에 지적한 "터무니없는 특권(exorbitant privilege)"이라는 표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이 특권은 무한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제국 쇠퇴할 때 과도한 재정 부담, 생산망의 약화, 그리고 제도적 신뢰의 붕괴라는 유사한 패턴을 보였다.

 

특히 달러의 '무기화'는 그 신뢰를 갉아먹는 요인으로 부상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미국과 동맹국들은 러시아의 외환보유액 약 3,000억 달러를 동결하고 SWIFT 접근을 차단하는 전례 없는 금융 제재를 단행했다. 이 사건은 달러 중심 체제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의 위험성을 세계 각국에 각인시켰고, 탈달러화의 속도를 실질적으로 높이는 전환점이 됐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5. 균열의 징후 ①: 호르무즈 해협과 위안화 결제

2026년 3월, 세계 금융 질서를 뒤흔들 수 있는 사건이 현재진행형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란은 미국·이스라엘의 군사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호르무즈 해협을 사실상 봉쇄했다. 이 해협은 하루 약 2,000만 배럴의 원유와 세계 LNG 무역의 약 20%가 통과하는 세계 최대 에너지 병목 지점이다.

 

여기서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군사적 충돌 그 자체가 아니라, 그에 수반된 금융적 조건이다. 이란은 위안화로 결제되는 원유를 실은 유조선에 한해 해협 통과를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제안이 현실화된다면, 52년 역사의 페트로달러 시스템에 대한 가장 심각한 도전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물론 중국 측 분석가들은 실제 운용상의 한계와 미·중 관계 악화 위험을 경고하며 신중한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6. 균열의 징후 ②: CIPS, SWIFT를 대체할 배관을 깐다

달러 결제망에 대한 도전은 에너지 시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 밑에는 더 조용하고, 더 구조적인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바로 결제 인프라 자체의 재편이다.

 

2015년 중국 인민은행이 출범시킨 CIPS(위안화 국경 간 결제 시스템)는 2024년 한 해 동안 8,216만 건, 총 175조 위안(약 24조 5,000억 달러) 규모의 거래를 처리하며 전년 대비 43% 성장했다. 거래 건수와 규모 모두 2020년 대비 3배 이상으로 늘었다. 

 

여기에 결정적 변화가 더해졌다. 이번 달 보도에 따르면, 베이징은 CIPS의 운영 규정을 8년 만에 처음으로 대폭 개정해 2026년 2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기존에는 위안화 결제에만 집중되던 CIPS가 이번 개정을 통해 다중통화 결제 및 타국 결제 채널과의 연동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전환됐다. 칭화대 연구팀은 이 변화가 CIPS를 서방 주도 SWIFT에 대한 실질적 대안 플랫폼으로 키우기 위한 포석이라고 분석했다.

 

중국 내 전문가들은 CIPS를 일대일로(BRI) 협력 프레임워크와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회원국으로 확산시켜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으며, 미국의 금융 제재가 확산되고 미·중 무역 갈등이 금융 영역으로 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베이징에서 커지면서 SWIFT 대안 구축에 새로운 긴박감이 생겨나고 있다. 

 

다만 CIPS의 현재 위상을 냉정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SWIFT가 235개국 이상 1만 1,500개 기관을 연결하며 사실상 모든 주요 통화를 처리하는 반면, CIPS는 규모가 훨씬 작고 위안화 결제에 특화되어 있으며, 심지어 자체 거래의 약 80%를 여전히 SWIFT 메시징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2025년 6월 기준 위안화는 SWIFT 글로벌 결제 통화 비중에서 3%에 그치며, 달러(48%)·유로(24%)와는 큰 격차가 있다. 

 

그러나 방향성은 분명하다. 2025년 6월에는 아프리카 수출입은행, 아부다비 퍼스트뱅크, 남아프리카 스탠다드뱅크, 싱가포르 UOB 등 아프리카·중동·아시아 6개 금융기관이 CIPS 직접 참가자로 신규 합류했다. 달러 제재의 불안을 느끼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국가들을 중심으로 대안 인프라에 대한 수요가 실질적으로 커지고 있다는 증거다.

 

7. 숫자로 보는 달러의 현재

달러는 여전히 세계 금융의 압도적 중심이다. 2024년 기준 달러는 전 세계 공식 외환보유액의 약 58%를 차지하며, 유로(20%), 엔(6%), 파운드(5%), 위안(약 2%)을 큰 폭으로 앞선다.

 

그러나 방향성은 바뀌고 있다. 달러의 글로벌 준비통화 비중은 2001년 정점 72%에서 2024년 58%대로 꾸준히 낮아졌다. 20여 년간 14%포인트가 빠진 셈이다. 극적인 추락은 아니지만, 완만하고 멈추지 않는 하락이다.

 

그렇다면 달러는 무너질 것인가?

 

답은 단순하지 않다. 달러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깊고 유동성이 높은 금융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다. 군사력, 기술력, 제도적 신뢰 역시 여전히 강력하다. 대규모 혼란이 없는 한, 당분간 달러가 세계 지배 통화 지위를 유지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구조 변화는 이미 세 방향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첫째, 에너지 결제의 다변화다. 호르무즈 해협의 위안화 조건은 그 상징적 정점이다. 둘째, 결제 인프라의 이중화다. CIPS의 다중통화 개편은 서방 금융망의 독점적 지위에 직접 도전하는 '배관 교체' 시도다. 셋째, 달러 무기화에 대한 집단적 헤징이다. 러시아 제재 이후 신흥국들은 달러 체제에 과도하게 종속되는 것 자체를 리스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달러는 '단일 패권'에서 '다극 체제의 핵심 통화'로 그 성격을 바꿔가고 있다. 달러의 종말은 극적인 붕괴가 아니라, 지배 방식의 점진적 변화로 나타날 것이다.

 

8. 새로운 질서: 경쟁하는 화폐들

오늘날 세계는 세 개의 축 위에서 재편되고 있다.

미국은 금융과 군사 기반의 달러 체제를 지키려 한다. 중국은 실물무역 기반의 위안화 국제화 전략과 CIPS라는 독자 인프라를 장기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러시아는 자원과 지정학적 영향력을 활용해 달러 이탈의 상징적 전위대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인도, 브라질 같은 신흥 강국들은 어느 한 축에 전적으로 기대지 않는 '전략적 헤징'을 구사한다.

이들의 경쟁은 단순한 패권 다툼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질서가 인류의 미래를 설계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다.

 

돈은 결국 신뢰다

 

돈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신뢰의 다른 이름이다. 달러는 여전히 강하다. 그러나 그 신뢰는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

 

호르무즈 해협의 위안화 조건, 8년 만에 개편된 CIPS의 다중통화 전략, 그리고 각국의 탈달러 움직임은 하나의 신호를 보낸다. 세계는 이제 하나의 화폐가 아닌, 여러 신뢰가 경쟁하는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달러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달러 패권 시대는, 분명히 변하고 있다.

작성 2026.03.20 10:23 수정 2026.03.20 10:23

RSS피드 기사제공처 : 씨초포스트 SSICHO Post / 등록기자: 이정우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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