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문신이었던 율곡 이이(李珥, 서기1537~1584년)는 외가인 강릉의 오죽헌(烏竹軒)에서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와 어머니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세 때는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기도 했지만 20세에 하산하여 유학(儒學)에 전념했다. 13살 때부터 29살 때까지 과거시험에서 무려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한 천재였기 때문에 당시는 거리를 지나가던 아이들까지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하며 우러러보았다고 한다.
율곡이 승려가 되었을 때 “생불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행패가 심했던 계모에게 약주를 따뜻하게 데워 권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율곡을 만나본 퇴계 이황이 “후생가외(後生可畏, 후배가 두렵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불과 23세 때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정립하였던 천재였다.
율곡 이이(栗谷李珥)는 한때 경기도 파주의 율곡리에서 살았는데 “율곡(栗谷)”이라는 호(號)는 그 동네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1568년에는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를 다녀왔고, 1583년에는 병조판서가 되어 선조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와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 등의 개혁안을 올리기도 했다. 또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도 힘썼으며 주자학의 핵심을 간추린 『성학집요(聖學輯要)』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하지만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이 연달아 자녀를 낳지 못하자 하는 수없이 세 번째 부인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율곡의 입장에서는 그런 일이 탐탁치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어머니 신사임당이 아버지에게 “내가 죽은 후에도 재혼하지 말아줄 것”을 여러 번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주막집 여인과 딴 살림을 차리고 그 여인을 끝내 아내로 맞이했기 때문이다.
율곡 이이(李珥)는 오랫동안 유학자로서의 면모가 부각되어 왔지만 정치인으로서도 영향력이 컸다. 본인은 평생 붕당(朋黨)의 대립을 해소시키기 위해 진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후 서인(西人)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생전에 이이(李珥)의 서얼 차별 완화 등의 개혁 정책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사후 조선에서 거론된 수많은 정책과 개혁론은 이이(李珥)의 사상과 정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율곡은 1584년 2월 27일, 향년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했다.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라는 별명까지 받았던 위와 같은 천재 율곡 이이(李珥)의 삶을 되돌아볼 때 우리는 인간의 삶은 신분을 불문하고, 또 천재와 바보를 불문하고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천재로 소문났던 율곡 이이(栗谷 李珥)도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세 번이나 혼인을 했고, 높은 벼슬을 하면서 국가의 백년대계를 설계했지만 그만큼 반대 세력의 견제를 받기도 했다. 또, 절에서 공부하면서 삶의 허무함을 느끼기도 했으며, 아무리 평균 수명이 짧았던 당시라 해도 47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한 것을 보면 보통 사람과 조금도 다름없는 삶을 살다간 사람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인생은 도토리 키재기”라는 말이 나왔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인생은 도토리 키재기”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도 사람들은 서로 제 잘났다고 으스대고 큰소리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상대방을 비판하는데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독설(毒舌)을 마구 뿜어대는 정치인들을 보면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만큼 덜떨어진 인간들이라는 생각이 분수처럼 솟아오른다. 그러나 인간 세상이 존재하는 한 그런 정치인들은 그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정치적 투쟁 또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하늘이 내린 본원적 인간사회이기 때문이다.
-손 영일 컬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