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리는 내려왔는데,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그분, 퇴직하고 나서 완전히 달라졌다.”
우리는 이런 말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장관, 차관, 청와대 수석, 대기업 CEO, 군 장성. 한때 수많은 사람이 고개를 숙였고, 전화 한 통이면 정책이 움직였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퇴직 이후 급격히 위축되거나, 사소한 일에 과도하게 반응하거나, 오히려 더 강하게 권위를 드러내려 한다는 이야기가 뒤따른다.
왜일까.
단순히 권력을 잃어서일까. 아니면 박수 소리가 멈춰서일까.
권력은 직무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권력은 심리 구조에 깊숙이 스며든다. 직위는 단순한 역할이 아니라, 타인의 태도와 사회적 반응을 통해 끊임없이 자존감을 강화하는 장치다. 매일같이 존칭을 듣고, 의전의 중심에 서고, 결정권을 행사하는 경험은 뇌에 강력한 보상 회로를 형성한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모든 것이 사라진다.
직위는 임기제지만, 권력에 의해 강화된 자아는 임기제가 아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직위는 역할이 아니라 ‘정체성’이 된다
사회심리학은 자아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개인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다. 개인적 자아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내부적 평가이고, 사회적 자아는 ‘타인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형성된다.
고위공직자는 구조적으로 사회적 자아가 극대화되는 위치에 있다.
보고를 받는 위치, 결정을 내리는 위치, 존칭과 예우가 자동으로 따라붙는 자리. 이런 환경은 개인의 능력과 별개로 자존감을 끊임없이 증폭시킨다. 시간이 흐르면 ‘나는 유능하다’는 인식이 아니라 ‘나는 중요한 사람이다’라는 정체성으로 굳어진다.
문제는 이 정체성이 직위와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직위가 사라지는 순간, 사회적 자아도 급격히 축소된다. 전화는 줄어들고, 일정은 비어가고, 이전에는 당연했던 존중이 선택 사항이 된다. 이때 개인은 단순한 역할 상실이 아니라 정체성 공백을 경험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지위 기반 자존감(status-based self-esteem)’의 붕괴라고 설명한다. 자존감이 내적 가치가 아니라 외적 지위에 의존해 형성된 경우, 지위 상실은 곧 자존감 붕괴로 이어진다.
권력이 중독처럼 작동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데이터가 말하는 권력과 심리의 관계
권력은 단순한 영향력이 아니다.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권력을 행사할 때 도파민 분비가 증가한다. 이는 성취감, 통제감, 쾌감을 동반한다. 반복될수록 강화된다.
고위공직자는 수년간 강한 통제 경험을 축적한다. 그런데 퇴직은 통제권의 급격한 소멸을 의미한다.
통제감 상실은 우울감, 분노, 무력감으로 이어지기 쉽다. 특히 조직 내에서 장기간 최고 의사결정권을 행사했던 인물일수록, 퇴직 이후 사소한 무시나 반대에도 과도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는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니라 통제 경험의 단절에서 오는 심리적 반동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네트워크 구조다.
고위공직자의 인간관계는 상당 부분 직위 중심으로 형성된다. 직위가 사라지면 관계의 밀도도 함께 줄어든다. 이때 “사람들이 나를 떠났다”는 감각이 형성되는데, 실제로는 관계의 성격이 달라진 것뿐이다. 그러나 당사자에게는 사회적 고립처럼 체감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퇴직 이후 사회적 지위가 급격히 낮아진 집단에서 자존감 하락과 우울 지표가 유의미하게 상승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특히 공적 권위에 오래 노출된 집단일수록 그 격차가 크다.
즉, 고위공직자의 권력 상실감은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구조적 환경의 결과다.
권력 상실은 왜 더 잔인하게 느껴지는가
일반 직장인의 퇴직과 고위공직자의 퇴직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일반 직장인은 조직 내에서 권한과 책임이 제한적이다. 반면 고위공직자는 상징 권력을 가진다. 상징 권력은 물리적 힘이 아니라 사회적 인정에서 나온다.
상징 권력이 클수록 상실의 체감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더구나 고위공직자는 의사결정의 중심에 서는 경험을 반복한다. 이 경험은 ‘내가 방향을 정한다’는 자기 인식을 강화한다. 퇴직 이후 더 이상 결정권자가 아니라 조언자가 되는 순간, 자아 구조는 급격한 위계를 경험한다.
그래서 일부는 퇴직 이후에도 영향력을 유지하려 하고, 일부는 과거 직위를 과도하게 강조하며, 일부는 새로운 권력 공간을 찾아 이동한다. 이는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자존감 복구 시도다.
권력은 외부에서 부여되지만, 그 영향은 내부에 각인된다.
문제는 우리가 이 과정을 개인의 품성 문제로만 해석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권력 구조가 만들어낸 심리적 후유증에 가깝다.

권력 이후를 준비하는 사회는 가능한가
고위공직자의 퇴직 후 상실감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문제일 수 있다.
첫째, 우리는 직위와 개인을 과도하게 동일시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누구’보다 ‘무슨 자리’가 먼저 소개된다. 이런 문화는 직위 중심 자아를 강화한다.
둘째, 퇴직 이후의 전환 교육이나 심리적 지원 체계가 부족하다. 군 장성이나 공직 고위직처럼 고강도 권위 경험을 한 집단일수록, 은퇴 전 심리 전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셋째, 사회는 퇴직자를 ‘전직 장관’, ‘전직 수석’으로만 소비한다. 개인의 새로운 정체성 형성을 돕는 환경은 부족하다.
권력은 일시적이다. 그러나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자아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묻지 않았다.
직위가 사라진 뒤, 그 사람은 무엇으로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가.
권력의 정상에 올리는 제도는 촘촘하지만, 내려오는 길을 설계한 제도는 허술하다.
고위공직자의 권력 상실감은 결국 우리 사회가 ‘자리를 곧 사람’으로 여겨온 문화의 그림자다.
권력은 중독이 아니다.
그러나 권력에 의존한 자존감은 중독이 될 수 있다.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우리는 사람을 키워왔는가, 아니면 자리를 키워왔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