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기'의 시간을 통과하는 두 종교의 고백... 형식에 갇힌 종교성을 넘어 '진정한 회개'의 본질을 묻다
지금 지구촌은 거대한 '절제'의 강을 건너고 있다. 한쪽에서는 해가 뜨고 질 때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는 무슬림들의 '라마단'이, 다른 한쪽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며 보라색 제단 앞에 무릎 꿇는 기독교인들의 '사순절'이 흐른다. 굶주림을 선택한 이들의 위장은 비어 가지만, 그 공간을 채우려는 영적 갈구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본지는 이슬람과 기독교, 두 거대 종교가 공유하는 '금식과 참회'라는 키워드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종교가 세상을 향해 내놓아야 할 진정한 답이 무엇인지 심층 분석한다.
왜 인류는 스스로 굶주림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가?
인간의 본능은 채움과 쾌락을 향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인류 역사는 가장 성스러운 순간마다 '비움'과 '고통'을 배치했다. 이슬람의 라마단은 단순히 배고픔을 참는 극기 훈련이 아니다. 이슬람력 아홉 번째 달인 라마단은 창시자 무함마드에게 인류의 지침서인 '꾸란'이 처음 내려온 축복의 달이다. 알라는 꾸란 2장 185절을 통해 "그달에 함께 있는 사람마다 단식으로 그달을 지내야 한다"라고 명하며, 이것이 인간을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길로 인도받음에 대한 '감사'의 표현임을 명시한다.
기독교의 사순절(Lent) 역시 그 뿌리는 깊은 광야에 닿아 있다. 부활절 전 주일을 제외한 40일의 기간은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겪은 40일간의 금식과 시험을 몸소 체득하는 시간이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물리적 시간이 아니다. 노아의 홍수 심판 40일, 이스라엘의 광야 유랑 40년, 모세와 엘리야의 40일 금식 등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나타나고 인간의 죄성이 정화되는 '거룩한 인내'의 상징적 수치다. 즉, 두 종교 모두 육체의 소리를 잠재우고 영혼의 귀를 열기 위해 '단식'과 '절제'라는 도구를 선택한 것이다.
꾸란의 명령과 성경의 재(Ash), 그 준엄한 가르침
무슬림들에게 라마단 단식은 '다섯 가지 기둥(실천 덕목)' 중 하나로, 거부할 수 없는 신앙적 의무다. 하디스(무함마드 언행록) 중 가장 권위 있는 '싸히흐 무슬림'은 "라마단을 단식으로 보내는 자는 이전의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라고 기록한다. 이는 단식의 목적이 단순히 위장을 비우는 데 있지 않고, 욕망을 통제함으로써 영적인 결백을 회복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기독교 사순절의 시작을 알리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은 인간의 유한함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예배자들의 이마에 얹어지는 '재'는 히브리어로 '에페르(Epher)'라 불리며, 이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강력한 참회의 상징이다. 욥은 재 가운데서 회개했고, 요나의 경고를 들은 니느웨 왕은 재 위에 앉아 통곡했다. 민수기 19장에 등장하는 '붉은 암송아지의 재'는 부정한 자를 정결케 하는 생명수로 사용되었다. 이 재는 인간이 결국 흙으로 돌아갈 존재임을 일깨우는 동시에, 그 절망적인 재 위에서만 그리스도의 속죄라는 꽃이 피어날 수 있음을 역설한다.
2026년 봄, 우리가 마주한 종교의 민낯
취재 현장에서 만난 종교의 모습은 때로 이 찬란한 정신을 무색하게 한다. 라마단 기간 이슬람권 대도시의 시장은 오히려 밤마다 열리는 성대한 파티로 식비 지출이 평소보다 늘어나는 모순을 보이기도 한다.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다. 사순절은 형식적인 교회력의 일부로 전락했고, 정작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는 각종 불법과 부패, 세습 논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사회적 기여도 통계에서 기독교가 타 종교에 비해 최하위권으로 밀려난 현실은 '재를 머리에 뒤집어쓰는' 참회가 실종되었음을 증명한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의 발화점은 화려한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추악한 죄를 대중 앞에 낱낱이 고백했던 한 사람의 '참회'에서 시작되었다. 차별과 부도덕, 기복적인 미신과 시기를 회개하며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울부짖던 그 현장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회복해야 할 사순절의 진정한 풍경이다.

다시, 본질로 돌아가는 시간
결국, 라마단과 사순절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같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굶주리고 있는가?" 텅 빈 배가 고통스러운 이유는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육신의 욕망에 의지해 왔는가를 반증한다. 무슬림의 단식이 알라를 향한 절대 순종의 고백이라면, 기독교인의 사순절은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오신 그리스도 앞에 나의 자아를 못 박는 시간이어야 한다.
타버린 재 위에서 부르는 소망의 노래
오랜 시간 기독교인으로서 무슬림들과 함께 살면서 깨달은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라마단의 엄격한 율법 아래 떨고 있는 영혼이나, 사순절의 경건함을 흉내 내는 메마른 신앙인이나,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내 힘으로 의로워질 수 있다'라는 오만의 포기다.
머리에 얹어진 재는 차갑고 무겁다. 그것은 죽음의 냄새다. 하지만 그 재가 내 삶의 모든 욕심과 교만을 태우고 남은 결과물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부활의 아침 햇살이 그 잿더미 위를 비춘다. 기독교 개혁 복음주의의 핵심은 '오직 은혜'다. 내가 굶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굶주리고 목마르셨던 그분의 공로를 의지하는 것이다.
이 사순절 기간, 우리는 단순히 고기를 끊거나 미디어를 절제하는 식의 '작은 희생'에 도취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 우리 안의 '소돔'을 직시하자. 교회의 부패와 나의 이기심을 끌어안고 재 위에 앉자. 진정한 회개는 눈물 몇 방울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완전히 튼 '혁명'이어야 한다. 2026년의 봄, 라마단과 사순절이 겹친 이 특별한 계절에 우리가 진정으로 정화되어, 타버린 재 너머에서 기다리시는 생명의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부활은 죽음을 통과한 자에게만 허락된 신비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