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공정책신문=김유리 기자] (편집자주) 박동명 교수는 서울특별시의회에서 보건·건강 정책 분야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며, 건강·복지·위생·급식 등 생활밀착형 정책의 구조적 쟁점을 현장에서 다뤄 왔다. 또한 국회의정연수원 등에서 지방의회 의원들을 대상으로 행정사무감사, 예산·결산 심사, 조례 입법과 정책평가를 강의해 온 실무형 전문가이다. 이번 칼럼은 최근 밀가루·설탕 등 핵심 식재료 가격 담합 의혹 사건을 계기로, 먹거리 물가를 “시장 자율”만으로 방치할 때 발생하는 구조적 불공정과 국민 건강권의 문제를 짚는다.
검찰이 최근 밀가루 가격 담합 혐의로 제분사 법인과 관계자들을 재판에 넘겼다는 보도는 국민에게 깊은 허탈감을 남긴다. 밀가루는 빵·과자·면류·급식·외식의 공통 원가이며, 설탕은 가공식품과 프랜차이즈 음료·디저트 가격 형성의 핵심 변수이다. 결국 몇몇 기업의 “가격 합의”가 가계의 식비와 자영업자의 원가, 지방자치단체의 급식·복지 예산을 동시에 흔드는 구조가 드러난 셈이다.
이번 사건의 더 큰 문제는 “기업의 일탈”을 넘어 “정책 구조의 취약성”을 드러냈다는 데 있다. 보도에 따르면 국내 밀가루 시장은 2024년 기준 1조3천억원 규모로, 상위 3개사가 70%가 넘는 점유율을 가진 과점 구조라는 분석이 제시된다. 과점 시장은 경쟁이 스스로 복원되기 어렵고, 담합의 유인이 커지며, 소비자는 피해를 입어도 대체재를 찾기 어렵다.
과점 시장에 “사후 처방”만 남으면, 물가는 반복해 흔들린다
공정거래법은 부당한 공동행위(담합)를 명시적으로 금지한다. 문제는 법의 존재가 아니라 집행의 타이밍과 억지력이다. 담합이 장기간 지속되었다면, 사후 제재만으로는 이미 발생한 생활물가 충격과 신뢰 붕괴를 되돌리기 어렵다. 게다가 담합으로 얻는 이익이 처벌의 기대비용보다 크다고 판단되는 순간, 시장은 다시 같은 선택을 반복한다.
현행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은 벌칙 조항에서 일정 위반행위에 대해 3년 이하 징역 또는 2억원 이하 벌금을 규정한다. 공정거래위원회도 담합(카르텔)을 대표적 경쟁제한 행위로 설명하면서 형사벌칙과 리니언시(자진신고 감면) 제도를 안내한다.
그러나 “생활필수재 가격을 수년간 흔들었다”는 사회적 피해 규모에 비해, 처벌 체감이 낮다고 느끼는 국민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먹거리 물가 급등은 ‘건강 불평등’으로 전이된다
먹거리 가격 충격은 단순한 지갑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취약계층일수록 식비에서 고정지출 비중이 높고, 가격이 오르면 식품의 양보다 먼저 질이 무너진다. 그 결과는 영양 불균형, 만성질환 위험, 정신건강 악화, 의료이용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 성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가구 식품불안정(food insecurity)이 의료이용과 연관됨을 보고한다.
결국 “담합 → 물가 상승 → 취약계층의 식품 선택 악화 → 건강 격차 확대”라는 경로가 현실 정책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먹거리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국민의 기본적 생존 조건이며, 건강권의 기반이 되는 공공적 재화이기 때문이다.
공공성 강화와 시장 투명화, 그리고 ‘예방형 거버넌스’로 전환해야 한다
첫째, 담합 억지력의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
처벌의 목표는 분노의 해소가 아니라 재발 방지이다. 담합의 기대이익을 확실히 낮추려면, 행정제재(과징금)·형사책임·민사배상이 유기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법 집행의 속도, 증거 확보 역량, 피해구제의 현실성이 함께 개선돼야 한다. 특히 생활필수재 영역은 “적발되면 손해”라는 신호가 분명해야 한다.
둘째, 가격 정보의 투명성을 ‘실시간’에 가깝게 끌어올려야 한다
원자재 국제시세, 환율, 운송비, 재고, 도매·소매 단계의 마진 구조가 불투명하면, 기업은 “원가 상승”을 명분으로 가격 인상을 정당화하기 쉽다. 최근 일부 기업이 담합 의혹 국면에서 설탕·밀가루 가격 인하에 나섰다는 보도는, 결국 시장이 필요로 한 것은 “명분”이 아니라 “검증 가능한 데이터”였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공공데이터 기반의 식품 원자재·가공재 가격 모니터링 시스템을 구축하고, 품목·시기별 인상 사유와 폭을 표준화해 공개할 필요가 있다.
셋째, 공급망의 공공성을 보강해야 한다
밀·원당 등은 해외 가격과 지정학 리스크에 영향을 크게 받는다. 민간의 조달 역량은 중요하지만, 위기 국면에서 국가가 아무런 ‘완충장치’ 없이 시장에만 의존하면 가격 충격이 서민에게 직격한다. 공공 비축, 수입선 다변화, 위기 시 방출 기준의 명확화 등은 “시장 개입”이 아니라 “시장 안정 장치”이다.
넷째, 지방정부·지방의회의 역할이 커져야 한다
학교급식, 복지시설 급식, 공공기관 구내식당 등은 지방재정과 직결된다. 지방정부는 계약·입찰·단가 조정 과정에서 가격 변동 데이터를 축적할 수 있고, 지방의회는 행정사무감사와 예산심사를 통해 “급식 단가 인상 요인”을 구조적으로 점검할 수 있다. 먹거리 물가를 중앙정부의 단기 대책에만 맡기지 말고, 지역 단위에서 가격·품질·공급 안정을 동시에 관리하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
다섯째, AI 기반 ‘이상징후 감지’로 예방행정을 강화해야 한다
가격이 비슷한 시점에 비슷한 폭으로 움직이고, 원가 변수와의 상관관계가 비정상적으로 약해지는 구간은 경고 신호가 될 수 있다. 공정당국과 물가당국은 공개된 가격·수입·재고·유통 데이터를 결합해 AI 기반 이상징후 모델을 운영하고, 특정 품목·업체군에 대해 조기 점검을 가동하는 예방형 체계를 도입해야 한다. 이는 규제의 과잉이 아니라, 생활물가의 공공성을 지키는 디지털 행정이다.
시장 자율만으로는 해법이 없다
먹거리 물가는 “경쟁”만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이며, 더 나아가 “건강”의 문제이다. 담합이 의심되는 순간 소비자는 기업을 믿지 못하고, 정부를 믿지 못하며, 정책 전반을 불신한다. 그 불신은 외식·자영업·급식·복지 현장으로 확산되고, 결국 취약계층의 건강권을 먼저 훼손한다.
지속 가능한 먹거리 정책은 공정한 경쟁, 투명한 가격 구조, 공공적 완충장치, 지역 단위의 실행력 위에 서야 한다. 정부는 공정거래·물가관리·식품정책을 분절적으로 다루는 관행에서 벗어나, 생활필수재를 대상으로 한 “예방형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 그것이 먹거리 물가 폭등의 그늘을 걷어내는 최소 조건이다.
▷법학박사, 한국정책연구원 원장
▷선진사회정책연구원 원장
▷(사)한국공공정책학회 부회장
▷(전)국민대학교 행정대학원 외래교수
▷(전)서울특별시의회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