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용 (수필가/철학자)
‘글 속에 길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있는 길입니다.
‘군자대로행’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군자는 큰길로 걷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길이 큰길일까요?
하나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좁은 문’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모두, 생각이 도달해야 할 인식의 소리입니다.
답이 있다, 없다는 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길이 있다, 없다는 식의 논리도 아닙니다. 답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길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는 답이어도 누구에게는 답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길이어도 누구에게는 길이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물며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시간과 공간이 달라지면 상황이 변할 수 있습니다.
명제를 바꿔도 말이 됩니다. ‘길 위에 글이 있습니다.’
글 속에서 길을 찾든, 길 위에서 글을 찾든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하늘을 보며 길을 묻든, 수평선이나 지평선을 바라보며 미래를 묻든,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며 사랑을 묻든 다 상관없습니다.
무엇이 글이고 길이고 사랑입니까? 문제가 있으면 어떤 방식, 어떤 형식으로든 대답은 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거울 속에 내가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얼굴을 보려면 거울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하지만 마음의 거울도 있습니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얼굴을 눈을 감고도 바라볼 수 있다는 얘깁니다.
악보 속에 음악이 있습니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습니다. 강물 속에 흐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있음은 전혀 다른 존재의 의미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악보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음악이 탄생합니다. 시계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때 시간이 생깁니다. 강물의 흐름을 압도할 수 있을 때 추억이 만들어집니다. 어둠을 무서워하지 않고 응시할 수 있을 때 별빛이 보입니다. 행동 속에 의도가 있고, 생각 속에 이념이 있습니다. 참으로 많은 명제들이 생각을 이어가게 합니다.
심연이 수면으로 돌변하고, 그 수면 위에 꽃을 피우는 것은 생각의 몫입니다. 생각이 떠오르면 그 생각이 꽃의 의미로 피어납니다.
사실 책은 안 읽어도 삽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
한강의 〈어느 날 그는〉이라는 단편 속에서 이 글을 읽었을 때 다양한 생각들이 얽히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비슷한 말을 여러 책들 속에, 다양한 곳에서 다른 말로 남겨놓았던 구절입니다.
공부 안 해도 삽니다. 사는 데는 지장 없습니다.
오히려 책을 읽으려 할 때 머리가 복잡해질 뿐입니다. 독서에 훈련되지 않은 정신에게 책읽기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책은 안 읽어도 됩니다.
공부 안 해도 늙어가다가 병들어 죽습니다. 굳이 힘들게 공부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나 다 죽습니다. 쉽게 살다가 편하게 죽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늘 미련은 남습니다. 항상 후회는 남습니다. 언제나 이 늘과 항상이 문제입니다.
늘, 항상, 언제나가 문제입니다.
죽음의 순간에 아쉬움은 피할 수 없겠지만, 그때 가서 웃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책을 읽으며 공부에 매진한 정신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가식적인 웃음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은 흑암을 무대로 하여 윤슬을 밝힐 것입니다. 심연을 밑에 깔고서 빛으로 충만한 희망과 자유의 축제를 벌일 것입니다.
연꽃은 수면 위에서 피어납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서 운행합니다. 어떤 말로 인식을 얻든 상관없습니다.
줄기 없는 연꽃은 없습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세기 1:2)
글 속에도 길이 있습니다. 어떤 길을 선택하든 상관없습니다.
삶의 의미는 살면서 실현될 뿐입니다. 인식은 죽은 자의 것이 아닙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렇게 내디디며 치열하게 사는 것이 삶입니다.
사람은 삶을 통해서, 삶은 사람을 통해서 모습을 드러낼 뿐입니다.
시계 속의 시간처럼, 악보 속의 음악처럼, 글 속의 길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