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담일보=한성희기자] 캐나다 출신 시인이자 고전학자인 앤 카슨(Anne Carson)이 202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카슨은 고대 그리스 문학과 현대의 감각을 결합하고 시와 산문, 번역과 비평의 경계를 넘나드는 글쓰기로 알려져 있다. 스웨덴 한림원은 그의 작품이 고전 전통과 유희적인 대화를 나누며 현대 문학을 위한 대담하고 창의적인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을 선정 이유로 밝혔다.

카슨의 문학을 이해하는 핵심은 익숙한 형식에 머물지 않는 태도다. 그는 고전 텍스트를 단순히 옮기거나 과거의 이야기로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고대의 신화와 문학적 인물을 현대의 감정과 관계 속에 다시 배치하고, 학술적 탐구와 서정적인 표현을 한 작품 안에서 결합한다. 이러한 작업은 문학이 무엇을 이야기하는가뿐 아니라 어떤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신화를 현대의 이야기로 바꾼 《빨강의 자서전》
카슨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빨강의 자서전》(Autobiography of Red, 1998)은 고대 그리스 신화 속 게리온을 현대적인 성장 서사의 주인공으로 다시 그린 운문 소설이다. 게리온은 붉은 날개를 지닌 괴물로, 그리스 신화에서는 헤라클레스와 관련된 인물이다. 카슨은 이 신화적 소재를 활용해 한 인물의 성장과 사랑, 정체성, 상처를 다룬다.
이 작품의 특징은 시의 언어로 서사를 이끌어간다는 데 있다. 사건을 순서대로 설명하는 일반적인 소설과 달리, 시적인 이미지와 압축된 문장이 인물의 감정과 경험을 드러낸다. 고대 신화의 인물이 현대적인 삶의 고민을 품은 존재로 바뀌면서 독자는 오래된 이야기를 낯설고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상실의 흔적을 책의 형태에 담은 《녹스》
《녹스》(Nox, 2010)는 카슨의 문학적 실험이 책의 물리적 형태로까지 확장된 작품이다. 세상을 떠난 오빠를 추모하며 만든 이 작품에는 가족의 흔적과 기억, 언어를 통한 애도의 과정이 담겼다. 카슨은 오빠와 관련된 자료와 기록, 라틴 시인 카툴루스의 시를 바탕으로 개인적인 상실을 문학의 형식으로 구성했다.
《녹스》는 일반적인 책처럼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는 방식과 다르다. 길게 이어진 종이를 아코디언처럼 펼쳐 읽도록 제작돼 독자가 기록과 이미지, 글의 조각을 따라가게 한다. 이처럼 책의 형태 자체가 작품을 경험하는 방식의 일부가 된다.
상실을 완결된 이야기로 정리하기보다 남겨진 흔적을 하나씩 마주하게 한다는 점에서 《녹스》는 기억과 애도를 다루는 독특한 작업으로 평가받는다. 개인적인 경험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억을 어떻게 기록하고 전달할 수 있는지까지 질문하는 작품이다.
욕망을 고전 문학과 철학으로 탐구한 《달콤쌉싸름한 에로스》
《달콤쌉싸름한 에로스》(Eros the Bittersweet, 1986)는 고대 그리스 문학에 나타난 사랑과 욕망의 구조를 탐구한 비평서다. 카슨은 고전 문헌을 읽고 분석하는 학자의 시선으로 에로스의 본질을 살핀다. 이 과정에서 욕망은 단순히 누군가를 향한 감정이 아니라, 결핍과 거리, 자신이 원하는 대상에 대한 인식과 연결된다.
이 작품은 카슨의 문학 세계에서 고전학과 창작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학술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문학적 감각을 놓치지 않는 글쓰기는 독자가 사랑과 욕망을 익숙한 감정의 차원에서 벗어나 생각하도록 이끈다.
고전과 현대 사이에서 새로운 문학 형식을 찾다
카슨의 작품 세계는 시와 산문, 번역과 비평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고대 그리스 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는 그의 창작을 떠받치는 기반이지만, 고전은 작품의 출발점일 뿐 목적지는 아니다. 과거의 이야기를 현재의 언어로 다시 읽고, 서로 다른 장르와 표현 방식을 결합하면서 새로운 문학적 가능성을 탐색한다.
2026년 노벨문학상은 이러한 형식적 실험과 고전의 현대적 재해석에 주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카슨의 작품은 독자에게 익숙한 이야기의 줄거리만 전달하기보다 언어와 형식, 기억과 욕망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그의 문학을 읽는 일은 고전 지식을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래된 신화가 오늘날의 사랑과 상처를 이야기할 수 있는지, 개인적인 기억이 어떤 형식으로 타인에게 전달될 수 있는지, 시와 학술적 글쓰기는 어디까지 만날 수 있는지를 함께 생각하는 과정이다. 카슨의 작품이 보여주는 매력은 바로 이처럼 문학의 경계를 다시 질문하는 데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