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
1949년 6월 6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강제로 해산된 날이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말 그대로 민족에 반하는, 배신하는 행위를 한 자들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였다.
해방 후 친일파가 세력을 잡다 보니 민족을 배신한 의미의 ‘배족’이나 반민족자라는 말 대신 친일파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 친일파는 일본과 친한 것이 아니라, 일본을 부모처럼 섬기며 따르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한민족을 위하기보다 일본을 위해 살고 일본을 높이 평가하다 못해 한민족을 깔보는 자들이다. 일본의 이익을 위해 일하다 보니 한국을 소홀히 하는 자들이다. 일본 문화나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친일파가 아니다. 그들은 한국에 손해를 끼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한국의 이익에 반하는 자들이 세력을 가지게 된 현상을 만든 시작이 반민특위 해산이라고 생각한다. 이승만이 노덕술을 구하기 위해 반민특위를 해산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이승만이 직접 반민특위 위원장이 김상덕이 거처하는 특위 관사를 두 차례나 찾아와 악질 친일 경찰 출신인 노덕술 등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러나 민족주의자 반민특위는 당연히 거절했다. 경찰이라는 공권력을 동원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전에도 친일파들은 반민특위를 빨갱이로 몰며 시위를 벌이고, 반민특위 위원을 괴롭혔다. 미군정이 다시 만든 경찰 조직은 일제강점기 경찰이었던 친일부역자가 대다수라 이런 시위대에 대해 느슨하게 대했다. 그러다가 이승만이 책임을 진다는 명령으로 반민특위를 강제 해산하기에 이른다.
당시 내무차관 장경근은 "앞으로 발생할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질 터니 특경대를 무장해제시켜라, 웃어른께서도 말씀이 계셨다"라고 이승만의 사전양해가 있었음을 암시하였다.
1949년 6월 6일 아침 남대문로에 있는 반민특위 사무실에 윤기병 중부경찰서장이 지휘하는 경찰관 40명이 일제히 사무실로 난입했다. 총을 든 경찰은 당시 사무실에 있던 사람을 마구잡이로 패며 끌고 갔다. 당시도 그들을 잡아가는 명분은 빨갱이였다. 중부서로 붙잡혀간 특위 직원들 35명은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이중 22명이 심하게 두들겨 맞아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였다.
반민특위 위원장인 김상덕을 비롯한 많은 위원은 후에 비참한 삶을 살았다.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이 다수였던 반민특위는 친일파에 의해 해산당한 것도 모자라 철저히 복수를 당했다. 그 복수는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과 후손에게도 겨누어졌다.
그래서 현대 한국 사회에서 독립운동가의 정의가 사라지고 친일파의 이기심이 한국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필 반민 특위가 해체된 날을 현충일로 지정한 이승만의 의도가 무엇이였는지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2·8 독립선언에 참여하였던 김상덕 위원장은 6·25 때 납북되었다. 이후 그의 후손의 삶은 비참했다. 김상덕 위원장이 임시 정부에서 일을 하며 아내를 잃었다. 또한 어린 딸도 잃게 되자 그는 자녀들을 이국 땅의 고아원에 맡겼다. 이런 비참한 삶은 해방 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납북된 아버지로 연좌제에 걸려 제대로 취업할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 의열단원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했으며 신간회 통영지회 총무간사를 지낸 김철호 선생님도 반민특위 위원으로 활동했다. 1950년 8월 맨발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고 한산도 앞바다에 끌고 가서 수장시켰다는 소식이 마지막이었다. 당시 통영 헌병대 문관이던 이판석 또한 서병두와 지역의 대표 친일파들이 김철호를 모함하여 죽게 했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진짜 빨갱이가 아니라 빨갱이로 몰아서 독립운동가를 죽였던 것이다.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다시 경찰이 되고 군인이 된 친일부역자들은 명분을 찾아야 했다. 그 명분이 분단된 조국을 이용해 민족을 위해 일하는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모는 것이었다.
이런 비극적인 역사는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하나로 뭉쳐야 할 한민족이 나누어져 깊은 골이 생기고 있다. 남한과 북한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남한에서 이념으로 갈라진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독립 공적이 아무리 뛰어나도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와 조금만 관련 있어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해 버린다. 그게 해방 후 남한에서 세력을 잡은 이들이 벌인 일이다.
독립운동가뿐 아니라 민간인도 공산주의로 몰아 수많은 분이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그리고 독재 시절에도 민주화 운동을 하는 이에게 그런 몰아가기는 재활용되었다. 지금도 역사를 제대로 모르는 이들은 그 몰아가기에 빠져 있다. 친일부역자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계속 반복되고 있어야 한다.
6월 6일은 반민특위가 강제로 해산된 날이다. 반민특위는 만들어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나마 해방 직후 제헌 국회에 의지가 강한 국회의원들이 이승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과해 낸 것이다. 그러나 노덕술을 비롯한 친일 부역자를 구하기 위해 이승만은 힘으로 해산시켜 버렸다.
노덕술이 얼마나 악랄한 고문을 했고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도 알수록 그가 단죄받지 않은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민족이라면 수많은 한민족을 죽인 이를 처벌해야 맞는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는 해방 후에도 독립운동가와 양만을 고문했고, 고문 기술을 전수해서 민주화 인사도 잔혹한 고문을 받는 역사를 만들었다.
만약 그가 제대로 단죄받았다면 한국 현대사에 많은 비참한 사람들의 죽음과 고문이 존재했을지 생각해 본다. 6월 6일 반민족행위자특별위원회 강제 해산일은 그런 생각을 해야 하는 날이라고 생각한다.
반민특위 해산한 친일파와 이승만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17323
https://www.e-sejo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39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과 그 자손의 삶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49061
독립운동가이자 반민특위 김철호와 그 자손의 삶
https://www.tynewspap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303
친일파 조사관의 어이 없는 죽음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691088
이승만과 노덕술
미군정이 망친 친일파 청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