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주 의회가 가족법의 '어머니'를 '임신한 부모'로, '아버지'를 '임신하지 않은 부모'로 바꾸는 법안을 통과시켜 주지사 서명을 기다리고 있다. 이 소식은 그 법조문 한 줄을 둘러싼 정치 공방이 아니라, '말을 바꾸면 존재도 바뀌는가'라는 더 오래된 질문을 따라간다.
어머니라는 말이 사라지는 자리 — 한 단어를 지우면 무엇이 함께 지워지는가
말에는 체온이 있다. '어머니'라는 두 글자를 발음할 때 사람의 가슴 어딘가가 미세하게 데워지는 것은, 그 단어가 단순한 명칭이 아니라 한 생애의 첫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구 반대편 뉴욕에서, 바로 그 말을 법전에서 들어내려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사건의 골자는 이렇다. 뉴욕주 의회가 양육권과 가정법, 교육법의 일부 조항에서 성별을 드러내는 용어를 성 중립 용어로 바꾸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어머니'는 '임신한 부모(gestating parent)'로, '아버지'는 '임신하지 않은 부모(non-gestating parent)' 혹은, 그냥 '부모'로 바뀐다. 친자확인을 뜻하던 '패터니티(paternity)'는 '부모 확인(parentage)'이 되고, 법적 관계가 확정되지 않은 생부를 가리키던 '추정 부(putative father)'는 '추정 부모(alleged parent)'가 된다. 하원이 먼저 3월에, 상원이 6월 2일에 의결했다. 이제 이 법안은 캐시 호컬 뉴욕 주지사의 책상 위에 놓여 서명을 기다린다. 아직 발효된 건 아니다. 펜 끝 하나에 한 시대의 언어가 걸려 있는 셈이다.
법안을 밀어붙인 이들의 명분은 분명하다. 보조생식술과 대리출산이 늘어나고, 두 어머니 혹은 두 아버지를 둔 가정이 실재하는 시대에, 법은 출산 여부나 성별과 무관하게 모든 법적 부모의 권리를 똑같이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법 바깥으로 밀어내지 않으려는 선의가 그 밑바닥에 깔려 있음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누구도 자기 가족이 '서류상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
그러나 선의가 곧 지혜는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짚어야 한다. '임신한 부모'라는 표현은 정확하지도 않다. 여성이 임신하는 기간은 일생 중 극히 짧은 한 철에 불과하다. 평생 자식을 안고, 먹이고, 키워 온 그 긴 세월을, 단지 '임신했던 한때'로 환원해 버리는 이 명명은, 포용을 내세우면서도 정작 어머니라는 존재의 거의 전부를 지워 버린다. 모든 사람을 끌어안으려다 도리어 가장 보편적인 한 사람을, 곧 어머니를 추상의 안개 속으로 흩어 버리는 역설이 여기에 있다.
말을 바꾸는 일이 왜 이토록 예민한가.
인간은 본래 이름을 붙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사람의 가장 첫 임무를 '이름 짓는 일'로 그린다. 아담이 짐승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그 장면(창세기 2:19~20)은, 이름이 곧 관계의 시작임을 말한다. 이름을 잃는다는 것은 관계가 흐려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한 사회가 어떤 단어를 법전에서 지울 때, 그것은 단지 표기를 정리하는 행정이 아니라, 그 단어가 가리키던 실재를 조금씩 희미하게 만드는 일이 된다.
물론, 언어는 흐른다. 시대에 따라 낡고 표현이 이상한 말들은 물러나고 새 말들이 들어선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흐름과 인위적 삭제는 다르다. 강물이 스스로 길을 바꾸는 것과, 사람이 둑을 쌓아 물길을 비트는 것은 같지 않다.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말은 어느 한 문화가 발명한 유행어가 아니라, 인류가 생겨난 이래 거의 모든 언어가 가장 먼저 갖춘 단어다. 아기가 세상에서 가장 먼저 옹알이는 소리도 '마마'와 '파파'다. 이토록 깊고 오래된 말을 행정 편의로 대체할 수 있다고 여기는 그 가벼움이, 나는 두렵다.
그러므로, 반대편의 목소리도 들어야 공정하다. 비판자들은 묻는다. 치솟는 세금과 무너지는 치안, 휘청이는 학교 앞에서, 입법자들이 마지막 회기에 매달린 일이 고작 단어 교체였느냐고. 정작 보살핌이 필요한 가정의 살림살이는 그대로 둔 채, 호명의 방식만 바꾼다고 누구의 삶이 따뜻해지느냐고. 이 물음은 정파를 떠나 새겨들을 만하다. 사랑은 단어를 고쳐 쓰는 데서 오지 않고, 실제로 곁에 머무는 데서 온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이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분노보다 먼저 어떤 쓸쓸함을 느꼈다. 우리는 점점 더 정교한 말을 만들어 내면서도, 정작 가장 단순한 말 한마디의 무게를 잊어 가는 것은 아닌가. '임신한 부모'라는 다섯 글자는 한 인간의 자궁을 정확히 묘사할지 모르나, 그 안에 새벽마다 깨어 우는 아이를 안고 서성이던 한 여인의 등은 담기지 않는다. '어머니'라는 말은 정의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라, 살아 낸 세월로만 채워지는 그릇이다.
나는 어떤 가정도 차별받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나 한 사람을 품기 위해 모두의 어머니를 지우는 길은, 결국 아무도 제대로 품지 못한다. 말을 바꾸기 전에 우리가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누구를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는가가 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