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 무덤 다섯 개가 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두 무덤에, 그리스도교라는 한 뿌리에서 갈라진 세 갈래—천주교(가톨릭), 정교회, 개신교—의 무덤이 더해진다. 다섯 모두 "흙에서 와 흙으로 돌아간다"는 같은 고백 위에 서 있으나, 흙을 덮으며 부르는 노래는 저마다 다르다. 유대교가 부활을 기다리는 절제의 노래라면, 이슬람교는 심판을 향해 가는 떨림의 노래다. 천주교는 연옥의 정화를 거치는 순례의 노래이고, 정교회는 영혼의 신비한 여정을 함께 기억하는 공동체의 노래이며, 개신교는 이미 비어 버린 무덤을 근거 삼는 확신의 노래다.
인간의 탄생이 그러하듯, 죽음 역시 우리가 스스로 계획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가장 신비롭고 장엄한 영역이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저마다 알지 못하는 각자의 종착지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 유일하고 거대한 미지의 세계를 두고 누군가는 인생의 허무한 종말이라 말하고, 또 누군가는 영원한 세계로 통하는 새로운 관문이라 믿는다.
최근 중동 전쟁의 화두 속에서 피격 사망한 이란의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장례식 일정이 사후 100일이 지나서야 마침내 공개되었다. 한 권력자의 죽음과 미뤄진 장례 행렬을 바라보며, 나는 화약고와 같은 중동 땅의 중심에 자리 잡은 각 종교가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마주하는지, 그 본질적인 내세관을 비교하면서 장례 예식을 고찰해 보려고 한다.
다섯 개의 무덤, 하나의 흙 - 죽음 앞에서 갈라지는 다섯 갈래의 길
중동의 한 골목에서 흰 천에 싸인 노인이 사람들의 어깨 위에 실려 가던 그날의 장면을, 나는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관도 꽃도 통곡도 없이, "인나 릴라히 와 인나 일라이히 라지운(우리는 알라께 속하였고 그분께로 돌아간다)"이라는 짧은 구절만이 거리를 따라 낮게 흘렀다. 그 앞에 오래 서 있으면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죽음을 다루는 방식이야말로 한 종교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가장 정직하게 드러내는 거울이라는 것이다. 산 자는 얼마든지 자신을 꾸밀 수 있지만, 죽은 자를 보내는 손길에는 그 공동체가 믿는 모든 것이 압축된다. 그렇다면 같은 아브라함의 뿌리에서 자라난 다섯 갈래의 손길은 과연 어디에서 만나고 어디에서 갈라지는가.
유대교 - 흙으로 돌아가되, 아직 오지 않은 부활을 기다리는 절제
유대교의 장례는 "속도와 단순함의 예식"이다. 사람이 죽으면 가능한 한 빨리, 대개 하루 안에 매장한다. 그 뿌리는 신명기 21장 23절에 닿는다. "그 시체를 나무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날에 장사하라." 시신을 오래 두는 것은 고인의 존엄을 해치는 일로 여겨진다.
그 중심에는 '타하라'라는 정결 예식이 있다. '거룩한 모임'이라 불리는 헤브라 카디샤의 사람들이 조용히 시신을 씻기고, '타크리킴'이라는 흰 삼베 수의를 입힌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똑같은 천을 두른다. 죽음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신학이 천 한 장에 담긴 것이다. 방부 처리나 화장은 전통적으로 금지된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창세기 3:19)라는 기록대로, 몸은 자연스레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장례 후 유족은 옷깃을 찢는 '크리아'로 슬픔을 표하고, 이레 동안 '시바'를, 이후 삼십 일의 '슐로심'을 지키며, 해마다 기일에는 '야르차이트' 촛불을 밝힌다. 흥미롭게도 유족이 외우는 '카디시' 기도에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오직 신의 이름을 높이는 찬양뿐이다. 그러나 그 기다림의 끝, 곧 메시아와 부활은 여전히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남아 있다.
이슬람교 - 심판을 향한 길 위에서, 떨리는 순종
이슬람교의 장례는 유대교와 놀랄 만큼 닮았다. 신속한 매장, 시신을 씻기는 예식, 흰 천의 수의가 그렇다. 무슬림은 사람이 죽으면 '구슬'이라는 정결 의식으로 시신을 홀수 번 씻기고, '카판'이라는 흰 천으로 몸을 감싼다. 남성은 세 폭, 여성은 다섯 폭이 일반적이며 화려함은 철저히 배제된다.
이어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장례 기도 '살라트 알 자나자'가 행해진다. 공동체 전체가 마땅히 져야 할 의무(파르드 키파야)다. 매장할 때 시신은 얼굴을 메카의 카바를 향한 ‘키블라’ 방향으로 둔다. 살아서 하루 다섯 번 향하던 그 방향을 죽어서도 향하는 것이다. 화장은 엄격히 금지된다.
꾸란은 말한다. "모든 영혼은 죽음을 맛보게 되리라"(꾸란 3:185). 무슬림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바르자흐'라는 중간 상태를 거쳐 부활과 심판의 날로 이어지는 통로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깊은 긴장이 있다. 무슬림은 평생 선행과 신앙을 쌓아도 자신이 천국에 들어갈지를 확신하지 못한 채 알라의 자비에 자신을 맡긴다. 그들의 절제된 침묵 속에는, 사실 심판대를 향해 가는 자의 떨림이 깔려 있다.
천주교(가톨릭) - 정화의 순례, 산 자가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는 길
이제 그리스도교라는 한 뿌리에서 갈라진 세 갈래로 들어선다. 첫째는 천주교다. 천주교의 장례는 세 마디로 이루어진 한 편의 순례 예식이다. 먼저 고인을 모시고 밤을 새우며 기도하는 '연도와 위령 기도'의 자리가 있고, 그다음 장례의 정점인 '장례 미사'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무덤가에서 드리는 '하관 예식'이 이어진다. 미사 중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는 부활초가 켜지고, 성수와 향이 관 위에 뿌려진다.
천주교 장례의 결정적 특징은 '연옥(Purgatorium)' 교리에 있다. 죽은 신자의 영혼이 천국에 들기 전 남은 죄의 흔적을 정화 받는 중간 상태가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산 자는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고, 그를 위한 미사를 봉헌한다. 죽기 전 사제가 행하는 '병자성사(옛 종부성사)'도 같은 맥락이다. 또한 천주교는 1963년 화장 금지를 완화했고, 2016년 교황청 지침을 통해 매장을 권장하되 화장을 허용했다. 다만 유골은 가정에 두거나 흩뿌리지 말고, 묘지 같은 거룩한 장소에 안치하도록 정했다. 천주교의 무덤은, 떠난 이가 산 자들의 기도와 함께 정화의 순례를 마저 걸어가는 길의 한 정거장인 셈이다.
정교회 - 영혼의 여정을 함께 기억하는 공동체의 신비
기독교의 두 번째 갈래는 동방 정교회다. 정교회의 장례는 다섯 전통 가운데 가장 신비롭고 시적이다. 흔히 관을 열어 둔 채로 예식을 치르고, 고인의 손에는 십자가나 성화(이콘)를 쥐여 준다. 사제와 신자들은 악기 없이 사람의 목소리만으로 '트리사기온(거룩하신 하나님)'을 길게 노래한다. 예식의 끝에는 신자들이 고인에게 다가가 십자가나 이콘에 입을 맞추는 '마지막 입맞춤'으로 작별한다.
정교회 신앙의 깊이는 매장 이후에 더 선명히 드러난다. 죽은 후 사흘째, 아흐레째, 마흔째 되는 날과 해마다 기일에 위령 기도(파니히다)를 드리며 영혼을 기억한다. 이때 빠지지 않는 것이 '콜리바'라 불리는 삶은 밀에 꿀을 섞은 음식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복음 12:24)라는 구절처럼, 한 알의 밀이 부활의 상징이 된다. 정교회는 천주교식의 정형화된 연옥 교리를 받아들이지는 않으나, 죽은 자를 위한 기도와 영혼의 여정에 대한 신비를 깊이 간직한다. 화장은 단호히 금지한다. 정교회의 무덤은 한 영혼이 외롭게 떠나는 자리가 아니라, 살아 있는 공동체가 그 여정을 끝까지 함께 기억하는 자리다.
개신교 - 이미 열린 무덤, 슬퍼하되 소망 가운데서
기독교의 셋째 갈래이자 마지막 무덤이 개신교이다. 개신교의 장례는 다섯 전통 가운데 가장 다른 색을 띤다. 매장과 화장을 모두 폭넓게 허용하며, 형식 자체보다 그 안에 담긴 신앙의 고백을 본질로 여긴다.
개신교 장례의 본질은 '예배'다. 슬픔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한복판에서 부활의 소망을 선포하는 예배인 것이다. 근거는 분명하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 것이다"(요한복음 11:25). 사도 바울은 더욱 또렷이 말한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않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4:13).
여기서 결정적 차이가 드러난다. 유대교가 부활을 기다리고, 이슬람교가 심판을 향해 갈 때, 천주교가 연옥의 정화를 순례하고, 정교회가 영혼의 여정을 함께 기억할 때, 개신교는 이미 일어난 그리스도의 부활을 '근거'로 삼는다. 예수의 빈 무덤이 모든 신자의 무덤에 대한 보증이 된 것이다. 그래서 개신교는 연옥도, 죽은 자를 위한 중보 기도도 인정하지 않는다. 구원은 살아 있는 동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단번에 결정되며, 사후에 산 자의 공로로 바뀌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개신교의 장례는 떠난 이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남은 자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다시 새기는 자리가 된다.
다섯 무덤을 나란히 놓고
나는 중동 무슬림 이웃들과 살을 맞대고 살아오면서, 그들의 장례 앞에서 늘 같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시신을 씻기는 정성스러운 손길, 모두가 똑같은 흰 천을 두르는 평등함, 신속히 흙으로 돌려보내는 겸손함 속에서 사람을 향한 깊은 존중을 보았다. 유대인의 절제된 애도와 찬양도, 천주교 미사의 장엄한 위로도, 정교회가 사흘과 아흐레와 마흔째 날짜를 세어 가며 한 영혼을 끝까지 기억하는 그 끈질긴 사랑도, 나는 절대 가볍게 여기지 못한다. 다섯 전통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죽음을 미화하지도, 외면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마지막을 진지하게 끌어안는다.
그러나 깊은 밤, 한 무슬림 친구가 "나는 천국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조용히 고백하던 그 목소리를, 나는 잊지 못한다. 한평생 그토록 경건하게 살아온 이가 자신의 마지막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 그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내가 붙든 복음이 무엇인지를 다시 깨달았다. 기독교의 무덤이 남다른 이유는 우리가 더 의롭거나 더 경건해서가 절대 아니다. 다만 한 사람이 우리보다 먼저 무덤에 들어갔다가 사흘 만에 그 무덤을 비우고 걸어 나왔기 때문이다. 그 빈 무덤 하나가 모든 것을 바꾸었다.
흙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차갑다. 유대인의 무덤도, 무슬림의 무덤도, 천주교와 정교회와 개신교의 무덤도 같은 흙으로 덮인다. 그러나 그 흙을 덮으며 부르는 노래만은 서로 다르다. 어떤 이는 기다림의 노래를, 어떤 이는 떨림의 노래를, 어떤 이는 순례의 노래를, 어떤 이는 기억의 노래를 부른다. 나는 다만 그 흙 위에 서서, 이미 비어 버린 한 무덤을 바라보며 소망의 노래를 부르고 싶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