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은 우는데, 정치는 그 민심을 굶겨 죽인다.
민심이 울고 있다. 그런데 정치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국민이 살려 달라고 신호를 보내는데, 돌아오는 것은 무감각한 변명과 공허한 구호뿐이다. 삶은 무너지는데 권력은 숫자만 만지고, 밥상은 비어가는데 정치는 말장난에 빠져 있다. 이쯤 되면 무능이 아니라 외면이고, 외면을 넘어 잔인함이다. 민심은 우는데, 정치는 그 민심을 굶겨 죽이고 있다.
정치는 원래 민생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국민이 힘들다고 하면 이유를 묻기 전에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아이가 울면 젖이라도 준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울음은 생존의 신호이고, 그 신호에 응답하는 것이 공동체의 최소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정치는 어떤가. 국민이 울어도 못 들은 척하고, 고통을 호소해도 통계 뒤에 숨고, 분노가 터져도 남 탓으로 돌린다. 책임져야 할 자들이 책임을 피할 때, 민심은 분노를 넘어 절망으로 간다.
아이가 울면 젖이라도 주는데 굶겨죽인다.
이제는 어떤 포장도 먹히지 않는다. 보여주기식 대책, 이벤트성 행보, 상대를 악마화하는 낡은 정치 공학으로는 돌아선 마음을 붙잡지 못한다. 한때는 통했을지 몰라도 지금의 국민은 속지 않는다. 누가 더 자극적인 말을 하는지가 아니라, 누가 자기 삶의 무게를 덜어줄 것인지 묻고 있다. 그런데 그 질문 앞에서 권력은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찍기’도 안 먹히고, 선동도 힘을 잃고, 겁주기도 통하지 않는다. 민심은 생각보다 오래 참지만, 한번 판단을 끝내면 냉정하다.
백약이 무효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처방이 없어서가 아니다. 진단이 틀렸기 때문이다. 국민은 먹고사는 문제로 신음하는데, 정치는 자꾸 엉뚱한 데 칼을 휘두른다. 현장은 무너지고 있는데 회의실 안 언어만 번지르르하다.
자영업자는 버티다 쓰러지고, 청년은 꿈을 접고, 노년은 하루를 걱정한다. 그런데도 권력은 “잘하고 있다”는 자기 최면에서 깨어나지 못한다. 국민이 느끼는 고통과 권력이 말하는 현실 사이의 간극이 이렇게 큰데, 무슨 수로 신뢰가 남겠는가.
더 심각한 것은, 민심의 경고를 아직도 일시적 소음쯤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아니다. 지금의 싸늘한 반응은 일시적 기분이 아니라 누적된 실망의 결과다. 참을 만큼 참았고,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는 뜻이다.
국민은 거창한 기적을 요구하지 않는다. 적어도 울고 있을 때는 손을 잡아주고, 무너질 때는 받쳐주고, 살 길이 막힐 때는 길을 열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최소한조차 하지 못한다면, 정치는 존재 이유를 잃는다.
권력은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국민은 약하지 않다. 조용히 지켜보다가도 어느 순간 단호하게 등을 돌린다. 그때 가서 메시지를 바꾸고, 사람을 바꾸고, 표정을 바꿔도 소용없다. 민심이 분노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살기 힘든데도 정치가 제 할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국민의 고통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정이고, 실패이고, 끝내는 심판의 대상이 된다.
정치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비판 그 자체가 아니다. 국민이 더는 기대하지 않게 되는 순간이다. 분노는 아직 관심의 다른 이름이지만, 체념은 완전한 결별의 시작이다. 지금 민심이 향하는 곳이 바로 그 체념이라면, 이는 보통의 위기가 아니다. 정권이든 정치세력이든 민생을 외면한 대가는 결국 혹독하게 돌아온다. 역사는 늘 그렇게 흘렀고, 민심은 늘 마지막에 정확했다.
정치는 국민을 먹여 살리라고 권한을 위임받는다. 그 권한으로 국민의 삶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이미 실패한 것이다. 하물며 울고 있는 민심 앞에서 끝내 손을 놓고 있다면, 그것은 무능한 정치를 넘어 잔인한 정치다. 지금 국민이 던지는 말이 왜 이토록 아프게 들리는지, 권력은 똑바로 들어야 한다.
민심은 우는데, 굶겨 죽인다.
지금의 정치를 이보다 더 정확하게 설명하는 말이 또 있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