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길을 걷다 보면 덕수궁 돌담과 함께 붉은 벽돌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정동에 붉은 벽돌 건물이 많은 이유는 이 일대가 개항 이후 외국 공사관, 선교시설, 근대식 학교와 병원이 모인 서울 근대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서울 중구 정동길은 덕수궁 돌담길의 정취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길을 조금 천천히 걸으면 또 다른 풍경이 보인다. 정동제일교회, 중명전,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이화박물관 등 여러 건물에서 붉은 벽돌과 서양식 건축 요소를 확인할 수 있다.
정동에 붉은 벽돌 건물이 많은 배경은 개항기 서울의 변화와 맞닿아 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은 외국과의 접촉이 늘었고,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뒤 정동에는 미국 공사관이 들어섰다. 이후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 서양 공사관이 차례로 자리 잡았다. 선교사들도 정동에 터를 잡았고, 교회와 학교, 의료시설이 이어지면서 정동은 서양 문물이 들어오고 받아들여지는 공간이 됐다.
당시 정동은 정치와 외교의 무대이자 신문물의 발신지였다. 해설 자료는 정동을 “근대사를 새롭게 확인할 수 있는 길”로 설명하며, 이곳이 외교·선교·교육·의료의 기지였다고 정리한다. 붉은 벽돌 건물은 이런 변화가 건축물로 남은 흔적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정동제일교회다. 정동제일교회는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예배 공동체에서 출발했다. 1897년에는 감리교 예배당 가운데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벧엘예배당이 이 자리에 완공됐다. 자료에는 정동제일교회가 벽돌 구조와 아치형 창문, 고딕 양식을 갖춘 북미계통 교회 건축물로 설명돼 있다.
덕수궁 권역의 중명전도 벽돌 건축의 흐름을 보여준다. 현재 중명전 자리에는 1897년 1층짜리 서양식 전각 수옥헌이 있었고, 1901년 화재 뒤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이 2층 벽돌 건물로 다시 지었다. 중명전은 황실 도서관, 황제의 집무실, 외교사절 접견 장소로 쓰였고,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이화학당과 이화박물관에서도 붉은 벽돌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이화학당은 1886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튼 여사가 세운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다. 학생 수가 늘면서 1897년 기존 한옥 교사를 헐고 붉은 벽돌로 2층 양관을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현재 이화박물관으로 쓰이는 심슨 홀은 1915년 건립된 뒤 증축과 복구를 거쳐 이화여고 교내에 남아 있는 오래된 건물로 전해진다.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도 정동의 붉은 벽돌 풍경을 대표한다. 이 성당은 화강석과 붉은 벽돌로 지은 로마네스크식 건물이면서 지붕, 기와, 창살 등 한국 전통 건축 요소를 함께 반영했다. 1922년 영국 건축가 아서 딕슨의 설계로 착공해 1926년 축성됐고, 1996년 원래 설계도를 바탕으로 남은 부분을 확장 완공했다.
정동의 붉은 벽돌은 단순한 색감이 아니다. 궁궐과 한옥 중심이던 서울에 외국 공사관, 교회, 학교, 병원, 신문사, 사교 공간이 들어서던 시기의 건축 언어다. 벽돌은 서양식 구조와 장식, 아치형 창문, 고딕·로마네스크 양식과 함께 정동의 근대적 풍경을 만들었다.
정동길이 특별한 이유는 이 건물들이 한 시대의 화려함만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외교의 긴장, 선교와 교육의 확산, 여성 교육과 의료의 시작, 대한제국의 자주 근대화 노력, 을사늑약의 아픔까지 함께 남아 있다. 붉은 벽돌은 그 모든 시간이 겹겹이 쌓인 표면이다.
정동길의 벽돌 건물을 따라 걷는 일은 서울의 근대사를 읽는 일이다. 덕수궁 돌담을 지나 정동제일교회와 중명전, 이화박물관,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을 차례로 마주하면 정동이 왜 ‘근대문화유산 1번지’로 불리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